새해 아침
김지헌
백지 한 장이 다시 주어졌다
온전히 비워진 주관식 문제지를 놓고
무슨 문장을 써 내려갈까
무슨 색칠을 할까 잠시 생각하다
저녁 무렵이 되어서야
아직도 빈 종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한때는 백지의 무게가 너무나 하찮아
쓸데없는 넉서로 채우곤 했었다
무엇을 그려도 수정이 가능했고
지난밤 수없이 파지를 구겨 던졌어도
아침은 어김없이 새 얼굴로 맞아 주었으니까
우물쭈물하는 사이
빈 종이엔 아무것도 채우지 못한 채
고해성사조차 미적거리다
또다시 맞닥뜨린 새해 아침
정답 칸을 하나씩 밀려 쓸 수도
모두 같은 답으로 채울 수도 없는 난감이라니
벼락치기 공부로 눈이 빨개진 아침
앞마당 잡풀 더미에선 분명 새순이 올라오고 있었다
지난 가을 골절된 손가락에 부목을 댔는데
이제야 조금 아물었다
다친 새끼손가락은 펴지지도 완전히 굽어지지도 않는다
왠지 아주 조금은 빚을 갚은 느낌
-전문(p. 43-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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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네르바』 2024-봄(93)호 <신작시 Ⅱ> 에서
* 김지헌/ 1997년『현대시학』으로 등단, 시집『심장을 가졌다』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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