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지에서 읽은 시 5605

변명/ 정채원

변명     정채원    옆구리를 들킬까 늘 조마조마했어요  고열로 앓고 나면  꽃이 툭툭 피어나곤 했으니까요  그러다 언제부턴가 얼룩덜룩 움직이더라구요  뭐라 말을 하듯 입술이 씰룩거리듯  그러나 소리는 없었어요  어쩜 내 귀에만 들리지 않았던 건지도 모르지요  심장이 불타는 사람의 수화처럼  어떤 날은 밤새 숨 가쁘게 움직였어요   눈 없는 벌레처럼 기어다녔어요 꿈틀거렸어요  아무도 알 수 없는 아름다운 흉터를 품고  우리는 이 세상에서 태어나는 걸까요  늘 들킬까 봐 숨기고 다니지만  그래도 믿을 건 그것밖에 없다는 듯  혼자 있을 땐 가만히  손을 넣어보곤 하지요  아직도 날아가지 못했구나  안심하곤 하지요   어쩌면 자기 귀에민 들리지 않는 말들, 남들은 다 듣고도 모르는 척해주는 걸까요 어떤 ..

공우림(空友林)의 노래 · 49/ 정숙자

공우림空友林의 노래 · 49      정숙자    귀뚜라미가 발등에 올라옵니다. 이따금 바람이 지나갑니다. 가랑잎 같은 달이 높고도 고요합니다. 저리 아름다운 달은 하늘보다 강호의 기쁨입니다. 지금 이대로 몸에 이끼가 나도록 앉아 있고(만) 싶어집니다. 부르려던 가을 노래는 마디마디 투명하여 보이지도 아니합니다. (1990. 10. 9.)                아큐는 누구일까요?    이 사람 저 사람 그 사람(들)에게  저자에 나가 또, 또, 또···   먹히고, 파먹히고, 퍼-먹히는, 아큐는   제 가슴속에 돌아와 홀로 승리하는  제 무덤처럼 웅크려 홀로 오열하던   그는,   자살하지 않기 위해 제 삶의 시한을 하늘에 맡긴 야인. 혹은 우리가 알거나 모르는 갑남을녀, 장삼이사, 파란불 켜졌을 ..

모퉁이/ 전순영

모퉁이     전순영    1  쇠망치가 달려들어 내리칠 때 쏟아지는 보석  더 내놓으라고 폭약을 쏟아붓자 그의 몸은 산산이 날아가  모퉁이에 버려졌다  백 년이 가버린 지금 그곳에다 붓을 대고 그어 내리면  비선대가 쭉 올라오고 다시 쭉 그어 내리면  좌정하고 앉아있는 미륵봉이 솟아오르고  다시 그으면  장군봉 허리에는 금강굴을 품고 있는  병풍처럼 깎아지른 화강암 절벽  그 아래 그림같이 펼쳐진 에메랄드빛 호수를 받아먹는  시든 나무들이 보스락보스락 일어서고 있다   2  얼음이 얼음을 꼭 보듬은 이월  솜털이 보송보송한 오엽송이 쭉 뽑혀 내팽개쳐졌다  물컹물컹 물러진 뿌리를 들고 휘어진 하늘 귀퉁이에 기대서서  밤과 낮이 물처럼 흘러가고  얼어붙은 아파리에 와 닿는 햇살에 조금씩 녹아내릴 때  뇌성..

천둥 번개 덧쌓인 바윗길에서/ 이건청

천둥 번개 덧쌓인 바윗길에서      이건청    태백에서 영월 쪽으로  차를 몰고 오면서  쉼 없이 스쳐 가는  바위 벼랑들을 만난다.  저 바윗돌들이  지구가 겪어온   전 역사이며 꿈이고  풍설이며,  세수歲壽 몇 억년,  지구 역사의 기표임을  천둥 번개로 촘촘히 짜 올린  그 시간의 몸뚱이임을   어느 바위 면은 어긋나 있고  휘어져 있으며  솟구쳐 있기도 한데  누 억 년 지구가 견딘  융기, 분화, 단절 그 모습 그대로  뭉치고 굳어  이 산하의 벼랑이며 비탈되어  누억 년 서 있구나   태백을 지나 영월도 지나  이 나라 어디서나 흔히 보는  바위 벼랑 길을 휘돌아 가며  누억 년 지구 역사를 헤인다.     -전문(p. 164-165>   -------------------- * 『시인하..

불면/ 신원철

불면     신원철    터벅터벅 마른 발소리  머리 위  열사의 태양  시곗바늘처럼 일정한 보폭  끝없이 사각이는  모래의 이명  점점이 찍히는 발자국 뒤에  따라오는   그림자의 적요     -전문(p. 155)   --------------------- * 『시인하우스』 2024-상반기(창간)호  2부> 에서 * 신원철/ 2003년『미네르바』로 등단, 시집『세상을 사랑하는 법』『동양하숙』『닥터존슨』등

밤의 성분/ 서안나

밤의 성분      서안나    밤은 어디까지 마음일까요  나는 밤을 오래 생각한다  무언가에 심취하는 일은 사랑과 같아  간 허파 갈비뼈 순서로 아프다   밤에 쓴 메모는 진실일까  밤에 쓴 메모를 아침에 지운다  밤은 휘발성인가   누군가 밤의 창문을 모두 훔쳐 간다  제멋대로 지나가는 것들마저 아름답다  약하고 아픈 것들은  수분이 많은 영혼을 끌고 다닌다  그래서 밤은 설탕 성분이 1:3 많고 고장이 잘 난다   내가 노래를 부르면  밤은 프로파간다처럼 모자를 쓰고  버려진 개와 고양이와 실패한 공원을 키운다  당신과 나와 실패한 것들은  왜 모두 밤에 포함되는가  공원의 밤은 왜 엔진처럼 시끄러운가   이어폰을 끼면 밤이 밀봉된다  유통기한이 길어진다   연결부위가 단단하다 밤은, 가끔 달아난다..

팔레스타인 피에타/ 백우선

팔레스타인 피에타      백우선    이스라엘군 공습으로  알자리라 방송 가자지구 지국장 와엔(53)은  2023년 10월 집에 있던 아내, 아들(15), 딸(7), 손자(1)를 잃었고  자신은 12월 취재 중 오른손을 다쳤으며  올 1월 7일엔 'PRESS'가 선명한 방탄조끼를 입고 차로 이동하던  같은 방송 기자인 아들 함자(27)도 잃었다.   손자 주검은 아들 함자 무릎 위에  아들과 딸과 아내의 주검은 와엘 무릎 위에 안겨있었는데  1월 7일부터는  손자, 아들 둘, 딸, 아내의 주검은 모두 와엘 무릎 위에 안겨있다.     -전문(p. 146)   --------------------- * 『시인하우스』 2024-상반기(창간)호  2부> 에서 * 백우선/ 1981년『현대시학』으로 등단, 시집..

정오의 산책/ 류미야

정오의 산책      류미야    풀리는 2월 천변은 생각으로 이어지고  풀지 못한 물음은 그림자로 길어진다  가슴속 묻은 말들이  봄꿈처럼 흐느끼는 곁,   결빙의 계절에서 살아 돌아온 왜가리  꼼짝없는 수심에 발목을 붙들린 채  마지막 남은 한 발을 총구처럼 장전했다   답 없는 도심에 존재의 닻을 내리고  왜? 라는 회의를 제 이름에 새긴,  물주름 환할 때까지 들여다보는  저 골몰   저린 물음들만이 생을 구원한다고  최후의 만찬 같은 한 끼 식사를 보며  풀리는 겨울 천변을  되짚어오는 한낮    -전문(p. 128-129)   --------------------- * 『시인하우스』 2024-상반기(창간)호 2부> 에서 * 류미야/ 2015년『유심』으로 등단, 시집『눈먼 말의 해변』『아름다운..

대림역/ 김윤

대림역     김윤   콸콸 흘러가는  버드나무 개울 옆에 살았지요  연길서는  내가 조선 사람인 줄 알았는데  여기 와서  중국 사람인 걸 알았어요   가정집에서 애를 봅니다  아이는 나하고는 연변 사투리를 써요  저녁에 제 엄마가 오면  서울말을 쓰지요  내 아들은  지린성에 두고 왔어요  아들은 내년에 서울 올 거요  고향이 그립지만  돌아가고 싶지는 않아요   힘들고 서러우면  대림역에 가요  골목 들어서면  양꼬치 굽는 냄새가 나요  쇠갈고리마다  말린 양고기가 걸려 있어요  중국 꽈배기를 파는 춘희 씨 노점을 지나   해란강 돌솥밥 지나서 골목 끝에   먼저 온 사촌이 지하 방을 얻었어요  주말에 고향 음식 해 먹고  밀린 잠을 잡니다  부르하통하 강가에  넋을 잃고 앉아 있다가  정신을 찾아..

어떤 방백(傍白)/ 박재화

어떤 방백傍白      박재화    어화, 사람들아 이 내 사연 들어보소  그대들은  충북 단양군 영춘면 하리 도로가1)에 잠든 내가  평강공주 덕에 벼락출세한 걸로 알지만  천만의 말씀, 만만의 말씀  이 온달溫達이 일천오백 년간 고구려인들의2) 가슴에  살아남은 건 그런 까닭이 아니외다   돌아보면,  고구려 22대 안장왕3)은 백제 한 씨 미녀와 염문을 뿌리더니 시해당하고,   그 동생 23대 안원왕安原王 때엔 후사를 둘러싼 갈등으로 이천 명이나 죽었으며4),  맏아들 24대 양원왕陽原王은 국내성파의 반란5)을 간신히 진압하였으나 그만 한강 유역을 잃고,  그 맏아들 25대 평원왕은 왕궁을 옮기면서까지6) 집권파인 상부 세력을 견제하며  왕권을 강화하려던 중이었소  이처럼 오래 나라가 어지러우니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