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확 1/ 최서림 물확 1 최서림 돌도 맑은 물을 먹어야 생명을 얻는다 제 성깔에 맞는 색깔을 낸다 하늘과 땅 사이, 하늘과 땅 모양으로 둥글어서 그득한 물확에 바위떡풀 하나 흰 꽃들이 기러기 모양으로, 시끄럽고 탁한 하늘을 텅 비어서 맑은 제 세상으로 바꾸며 높이 날아가고 있다 시간을 거슬러 올라타서 길을 열.. 시집에서 읽은 시 2011.01.15
물확 2/ 최서림 물확 2 최서림 옛것은 새것보다 더 새것이다. 세월이 이끼로 거무스름 눌러 붙어 있는 돌, 오래오래 흘러와서 새로워진 물이 하늘모양 둥글게 담겨 있다 돌을 갈아 거울로 만들던 아름다운 시절의 가을 하늘, 눈 시리게 거꾸로 잠겨 있고 천 년 전의 새털구름, 무심히 떠서 흘러간다 광화문 사거리, 시.. 시집에서 읽은 시 2011.01.15
이름 하나 외우며/ 박소원 이름 하나 외우며 박소원 발가락에 자꾸 힘이 들어간다 보고 싶다 용아 땅바닥에 헌 운동화 끝으로 이름을 썼다 쓱쓱 지운다 정류장 한 귀퉁이 움푹 파이고 머리 위 백일홍 붉은 꽃이 흔들린다 꿈속에서도 올 수 없는 이승의 이정표 아래에서 지우지 못한 이름 하나 이렇게 외우며 나는 턱없이 늙어버.. 시집에서 읽은 시 2010.12.29
투석/ 박소원 투석 박소원 때맞추어 시체처럼 굳어지면 나는 몸속의 구석구석 낯설고 험한 길을 간다 낯선 곳으로 가문도 모르는 곳으로 그곳까지 흘러가면 배꽃이 만개한 과수원에 머물게 된다 명치께쯤, 거기에도 길이 뚫리고 새로운 내가 통하는가 어머니의 야윈 목을 누르던 두터운 아버지의 손도 정말 용서할.. 시집에서 읽은 시 2010.12.29
청동물고기/ 임연태 청동물고기 -월롱산 일화(逸話) 5 임연태 월롱산 용상사 명부전 추녀 끝 청동물고기 허공에 입 벌리고 있는 까닭을 누구에게 묻기도 쑥스럽고 경전 뒤적여 찾아낼 재간도 없어 그저 궁금한 마음으로 바라보기만 하던 터였는데 보름달 환한 밤에 화들짝 그 까닭 보았다. 떨그렁 떨그렁 하염없던 풍경소.. 시집에서 읽은 시 2010.12.28
화탕지옥/ 임연태 화탕지옥 임연태 석양녘, 행자는 산에서 썩은 나무를 한 아름 모아 와 군불을 지핀다 활활 타들어가는 아궁이에 나무를 던져 넣으며 반야심 경을 외우는 행자의 뒤통수에 대고 노스님이 호통을 치십니다. “이놈, 썩은 나무로 군불을 때면 안 된다.” “썩은 나무가 불에 잘 타잖아요…” 노스님은 나.. 시집에서 읽은 시 2010.12.28
그림자와 종소리/ 이원로 그림자와 종소리 이원로 끝자락이 새 자락에 매달린다 새 손이 옛 손을 끌어당긴다 그림자가 발에 닿았다 종이 울리지 십분 전 봄비 내리던 숲에 칼바람이 눈발을 날린다 그림자가 배꼽에 닿았다 종이 울리기 오분 전 꽃잎은 왜 하염없이 날리는가 풍성한 열매는 무엇을 자랑하나 어디에서 눈이 바라.. 시집에서 읽은 시 2010.12.27
산수유/ 김현숙 산수유 김현숙 눈바람 사이를 용케 빠져나온 나무들 앙상하게 도드라진 등뼈는 햇살을 걸치고 이내 두툼해진다 하릴없이 허공에 한 줄씩 쳐놓은 거미줄에도 한 번씩은 잽싼 생(生)의 날개들 대박이 걸려든다 *시집『물이 켜는 시간의 빛』에서/ 2007.9.1 <한누리미디어>초판 발행 2010.12.1 <한누리.. 시집에서 읽은 시 2010.12.26
밥그릇을 위하여/ 김현숙 밥그릇을 위하여 김현숙 나, 밥그릇 밥보다 많은 눈물이 찰랑거렸다 식솔과 먹고 사는 일 짧은 개미다리로 바삐 뛰다가 땡볕에선 목마른 매미울음을 쏟았다 가끔 밖에서 받는 따뜻한 밥상머리에서는 순한 가시, 두 아들 목구멍에 딱 걸렸다 아직도 밥은 나의 천적이다 선생 놓은 지가 언젠데 그 바른 .. 시집에서 읽은 시 2010.12.26
이명/ 최정애 이명 최정애 엘리베이터가 고장 나던 날 귓속으로 경고등이 지나가고 있었지 도넛이 빨갛게 튀겨지고 턴테이블에서 경음악이 흔들렸지 귓속으로 구급차가 달릴 때 엔진 소리가 방충망에 건조대에 내 깊은 머리를 통과하는 중이었지 모래밭에서 시동을 걸었지 끝이 보이지 않는 해변을 달리고 자정 .. 시집에서 읽은 시 2010.12.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