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이 핀다/ 최정애 돌이 핀다 최정애 돌멩이를 던졌는데 꽃 한 송이가 피고 있다 꽃을 피우며 돌은 호수 가득 적막을 밀어내고 있다 물이 한 겹 한 겹 껍질을 벗는다 어제의 빗물을 흘리다가 바람의 뼈대를 쏟아낸다 붉은 공기가 팽창하는 틈새에서, ‘돌이 살아 있나 봐’ 돌멩이 한 알의 숨소리를 듣는다 물의 경계를 .. 시집에서 읽은 시 2010.12.20
청마와 춘수/ 강희근 청마와 춘수 -두 시인에 관해 논문을 쓴 뒤 청마와 춘수는 많이 다르다 한 사람이 바다라면 한 사람은 뭍이다 청마가 살았던 집 그 집은 약봉지 냄새가 났다 춘수가 살았던 집 그 집은 꽃잎 버는 냄새가 났다 청마는 시를 쓸 때 약 달이듯이 쓰고 춘수는 시를 쓸 때 꽃구경 가듯이 쓴다 그래서 청마의 시.. 시집에서 읽은 시 2010.12.19
생애/ 강희근 생애 강희근 한 시인의 생애를 시선집으로 읽다가 생애가 눈물이라는 걸 알았다 생애가 그리움이라는 걸 알았다 그러나 시는 눈물이 아니라 그리움이 아니라 불면까지 끓여내는 솥이라는 걸 알았다 시인은 제 맞춤형 솥 하나 걸어놓고 비 내리는 날 섞어치는 비, 빗방울 땔감으로 불 지피고 눈 내리는.. 시집에서 읽은 시 2010.12.19
투투섬에 안 간 이유/ 김영찬 투투섬에 안 간 이유 김영찬 나 투투섬에 안 간 것을 후회하지 않아요 투투섬 망가로브 숲에 일렁이는 바람 거기서 후투티 어린 새의 울음소릴 못 들은 걸 후회하지 않아요 처녀애들은 해변에서 하이힐을 벗어 던지겠죠 물살 거센 파도에 뛰어들어 미장원에서 만진 머리를 풀어젖힌다죠 수평선을 끌.. 시집에서 읽은 시 2010.12.18
너바나(nirvana)의 길/ 김영찬 너바나(nirvana)의 길 김영찬 모든 단추는 집이 있다네 똑딱단추는 제 집에 들어 갈 때 똑딱~ 노크하는 버릇. 단추집이 있다네 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 뿔단추는 뿔고동 일부러 크게 불어 단춧구멍 큰 대문 열고 의기양양 으스대며 들어간 다네 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 시집에서 읽은 시 2010.12.18
앵두나무/ 박정수 앵두나무 박정수 마을 초입 우물 하나 있었다, 그 우물 영월댁 셋째딸이 뛰어든 이후 흔적마저 사라졌다 한낮 마을은 콩밭으로 옮겨진 듯 비워지고 붉음은 가지 끝까지 오르다가 숨겨진 기억을 내뱉듯 온몸이 가팔라졌다 열아홉 처녀의 짝사랑이 숨어 있기 좋은 곳이다 어쩌면 우물의 밑바닥까지 뿌.. 시집에서 읽은 시 2010.12.17
시월, 화요일/ 박정수 시월, 화요일 박정수 하늘이 너무 높아 미장원에 갔었지 결코 푸르게 염색하려는 의도가 아니었어 북쪽으로 문이 난 가게는 오후 세 시에 이미 햇살을 잘라내고 흰 벽의 거울만 환했지 중년의 수다를 말아올린 듯 김 오르는 세상처럼 곱실거렸지 막 풀려나간 파마롯드엔 한 여자의 체온이 스멀스멀 흩.. 시집에서 읽은 시 2010.12.17
잠깐, 머리를 흔들어봐! / 고은산 잠깐, 머리를 흔들어봐! 고은산 뭉텅뭉텅 아픈 생각, 가느다랗게 촉수를 뻗치며, 굽이치는 달빛의 꽁무니를 따라 깊은 시골의 고샅길을 걷는, 기억을 쫓아봐 어둠의 홰 위에서 날갯죽지 퍼덕이며, 밤에 흉터를 내는 수탉의 발톱에 낀 흙먼지 같은, 삐죽삐죽 돋아난 두개골의 편린들 쫓아봐, 그리고, 잠.. 시집에서 읽은 시 2010.12.09
벚꽃축제/ 고은산 벚꽃축제 고은산 군중 속 엿가위 허공을 싹둑싹둑 자른다. 부딪는 소리는 웅성거림 속 높은 음계로 휘젓는다. 귓바퀴에 에도는 난장의 음파가 시골 벚꽃축제 장터 머리 위 까치발로 높이 서 있다. 길 옆 좁은 구석에 자리 잡은 한 사내, 어두운 듯 전선을 달아 부지런히 움직��다. 방금 핀 벚꽃, 흥이 .. 시집에서 읽은 시 2010.12.09
합창단/ 김행숙 합창단 김행숙 우리들이 똑같은 모양을 입술을 벌릴 때 입안에 담은 것과 입술 바깥으로 퍼져 나가는 것이 모순을 일으킬 때 어느 쪽에도 진실의 발톱은 달려 있어요 치솟는 얼굴에서 턱을 끌어당기며 한층 낮은 음으로 인도합니다 어느 가을날의 심정으로 우리들은 얼마나 높은 음정까지 올라갈 수 .. 시집에서 읽은 시 2010.12.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