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화과
김지하(1941-2022, 81세)
돌담 기대 친구 손 붙들고
토한 뒤 눈물 닦고 코 풀고 나서
우러른 잿빛 하늘
무화과 한 그루가 그마저 가려 섰다.
이봐
내겐 꽃시절이 없었어
꽃 없이 바로 열매 맺는 게
그게 무화과 아닌가
어떤가
친구는 손 뽑아 등 다스려 주며
이것 봐
열매 속에 속꽃 피는 게
그게 무화과 아닌가
어떤가
일어나 둘이서 검은 개굴창가 따라
비틀거리며 걷는다
검은 도둑괭이 하나가 날쌔게
개굴창을 가로지른다
-전문-
◈ '긍지의 날', 자존의 빛과 그늘 (前) 왕가위 영화와 시 읽기의 즐거움(부분)
"모용언/모용연"이라는 자웅동체雌雄同體의 페르소나가 불러들이는우리 현대시의 작품 역시 특정 시대의 상황이나 제한된 역사적 국면을 넘어서, 좀 더 보편적인 존재론의 차원에서 타인과 세계로부터 인정받으려는 욕망과 더불어 그 주체성의 변증법을 드러내고 있는 작품일 수밖에 없을 듯하다. 달리 말해, 우리 안에서 들끓는, 타자에게 인정받으려는 욕망과 그 실패의 드라마를 소묘하고 있는 시편을 다시 불러와야만 한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헤겔이 『정신현상학』에서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이라 불렀으며, 라깡이 『에끄리』에서 '인간의 욕심이란 대타자의 욕망이다.'라고 명시했던 타자(대타자)에게 인정받으려는 욕망, 곧 '주체의 전복과 욕망의 변증법'에 오랫동안 머물러보라. 나아가 "무화과"라는 절모한 결핍과 낭만적 초월의 심상을 동시에 거느리고 있는 김지하의 시 한 편을 다시 느릿느릿 읽어보라. 왕가위를 통해(영화 <동사서독; 리덕스> 블로그 참고) 다시 읽는 「무화과」는 우리 안에 깃들일 수밖에 없는 자웅동체雌雄同體, 그것이 겯고트는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을 다시 마주치도록 강제할 것이다. 아니, 그 인정 투쟁의 드라마를 다시 생생하게 우리 눈앞에 펼쳐 놓을 것이 틀림없다. (p. 시 65-66/ 론 64-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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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찬 문화비평집 『신성한 잉여』에서/ 2022. 9. 29. <작가> 펴냄
* 이찬李燦/ 1970년 충북 진천 출생, 2007년《서울신문》신춘문예를 통해 문학평론가로 등단, 저서『현대 한국문학의 지도와 성좌들』『20세기 후반 한국 현대시론의 계보』『김동리 문학의 반근대주의』『한국 현대시론의 담론과 계보학』, 문학평론집『헤르메스의 문장들』『시/몸의 향연』『감응의 빛살』, 2012년 제7회 김달진문학상 · 젊은평론가상 수상, 현)고려대학교 문화창의학부 부교수/ 영화와 시와 비평이 더불어 감응할 수 있는 크로스오버 공간을 모색하고 있으며, 다양한 철학적 사유와 예술 이미지의 횡단과 융합을 통해 새로운 글쓰기 스타일을 실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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