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평집 속의 시

오태환_자기 응시의 순정하고 오연한 형식(부분)/ 저녁연기 : 오탁번

검지 정숙자 2024. 3. 13. 02:16

 

    저녁연기

 

    오탁번(1943-2023, 80세)

 

 

  해가 지는 것도 모른 채 들에서 뛰어놀다가, 터무니없이 기다랗게 쓰러져 있는 나의 그림자에 놀라 고개를 들면 보이던 어머니의 손짓 같은 연기, 마을의 높지 않은 굴뚝에서 피어올라 하늘로 멀리멀리 올라가지 않고 대추나무 살구나무 높이까지만 퍼져 오르다가는, 저녁때도 모르는 나를 찾아 사방으로 흩어지면서 논두럭 밭두럭을 넘어와서, 어머니의 근심을 전해주던 바로 그 저녁연기였다. 

    -전문-

 

  ▶자기 응시의 순정하고 오연한 형식(발췌) _오태환/ 시인

  모두 하나의 문장으로 짜여진 이 시는 소설 「저녁연기」의 한 장면을 그대로 옮겨놓는다. 차이가 있다면, 쉼표의 위치가 "퍼져 오르다가는" 뒤에서 "넘어와서" 뒤로 옯겨진다는 점이다.

  소설은 군청 공무원인 화자가 형의 갑작스런 호출을 받고 고향인 평장골로 향하는 지점에서 출발한다. 고향을 굳게 지키며 마을 이장과 농협 이사를 떠맡은 형은 선대의 문헌집 제작과 아버지 묘비 건립을 의론하려 들지만, 정작 화자는 그러한 모습에 불편함과 적의를 느낄 따름이다. 그의 관심은 온통 고향 가는 길에 만난 어린 시절 소꿉친구 현주와 고향마을 초입에서 바라본 저녁연기에 쏠려 있다.

  소설은 사라져가는 것들, 사라질 수밖에 없는 것들에 대한 향수로 채워진다. 도시 생활에 지치고 망가진 현주는 아무도 알려 하지 않는 이유로, 어쩌면 매춘을 결심했기 때문에 고향에서 사라지려 한다. 저녁연기는 새마을운동에 따른, 떌나무 걱정 없는 연탄아궁이의 보급으로 마을에서 영영 사라질 수밖에 없는 처지에 있다. 화자에게 이 둘은 의도했든 그렇지 않든 애초에 있던 자리로부터 소외되고 있다는 점에서 매한가지다. "너도 그래." 현주가 화자에게 집으로 돌아가며 마지막으로 던진 말이다. 화자는 고향의 유지이면서 가문의 수호자임을 자처하는 형에게 미묘한 반감을 느끼고 있다. 양반 끄트머리였던 가문을 다시 일으키는 사업도, 가문의 충직한 일원으로 형에게 복속되는 것도 그에게는 마뜩지 않다. 이로부터 도피를 꿈꾸는 화자 역시 현주나 저녁연기와 진배없다. 화자 역시 사라져가는 것들, 사라질 수밖에 없는 것들의 일부였던 것이다. 그러나 현주도 버젓이 알고 있는 이 사실을 화자는 인정하지 않는다. 그래서 "너도 그래."를 듣는 순간마저 그는 사춘기 때의 유치한 자신으로 돌아가는 상상에 빠질 뿐이다. 일종의 시치미떼기 수법이다.

      (···) 

  시의 저녁연기는 소설과 마찬가지로 "평화로운 허기증"을 배면에 깔고 있다. 소설에서는 그것이 현주와 얽힌 에피소드로 채워진 데 비해, 시에서는 어머니와 관련된 기억으로 형상화된다. 시의 내용은 끼니때가 되어 저녁까지 놀고 있는 화자를 부르는 어머니와, 마을을 낮게 감싸며 도는 저녁연기를 비유관계 속에 묘사한다. 두 모습이 거의 동시에 보일 수 있다는 점에서 어느쪽이 원관념이든, 어느 쪽이 보조관념이든 문제가 될 듯하지 않다. 시에서는 어머니가 보조관념으로 저녁연기가 원관념으로 적시되어 있다. 그런데 다 읽은 후 고개를 돌리고 나면 정말 그런가, 다시 톺아 읽게 되곤 하는 이상한 경험을 하게 된다. 그러고 보면, 원관념과 보조관념이 모호해서 구별이 잘 안 될 때, 시의 의도가 오히려 제대로 살지 싶은 터무니없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p. 시 357/ 론 357-358 (···) 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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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탁번 시 읽기 2 『좋은 시는 다 우스개다』에서/ 2024. 1. 25. <태학사> 펴냄

  * 오태환/ 1984년 《조선일보》《한국일보》신춘문예로 등단, 시집『복사꽃, 천지간의 우수리』『바다 내 언어들의 희망 또는 그 고통스러운 조건』등,  시론집『경계의 시 읽기』『그곳에 가지 않았다: 시의 아포리아와 시 읽기의 반성』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