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굴 · 이름 · 주소 · 상징
정숙자
1. 신의 선물_얼굴
아침저녁으로, 수시로 거울에 비치는 저 얼굴은 생명에 부여한 신神의 선물일 것이다. 사람의 힘으로야 어떻게 솔기 없는 육체를 그리도 다양/섬세하게 제시할 수 있겠는가. 그러고 보니 인간뿐 아니라 시공간에 던져진 ‘삶’의 실체들은 저마다의 고유한 영혼과 이목구비가 신의 사랑임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신의 선물이 생명일진대 어느 누가 감히 아끼지 않을 수 있겠는가. 부모는 아기를, 아기는 스스로를 아끼고 또 아끼며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함께 성장한다.
아기가 부모님께 맨 처음 갚은 은혜는 방긋 웃어 보인 그 얼굴에 있다. 밤잠 안 자고 울며 보채던 아기가 언제인지 모르게 ‘방긋’ 웃는 얼굴로 눈 맞추었을 때, 부모는 온갖 시름을 잊어버린다. 사실은 그 웃음도 부모로부터 ‘배운’ 이 세상의 첫 언어였을 것이다. ‘까꿍’을 반복하며 엄마가 보여준 수백 번의 얼굴이 아니었다면 아기의 웃음은 좀 더 늦어졌을지 모른다. 본능적으로 내지르던 ‘배고픔’의 앙앙 하나로 이 세상을 알아가게 된 아기가 있다면 얼마나 큰 슬픔일까.
아기가 한 단어를 습득하여 말할 수 있기까지는 오천 번 이상 들어야 된다고 한다. 아기에게 ‘엄마’, ‘아빠’라는 말을 가르치기 위해 반복했던 ‘엄마’, ‘아빠’를 돌이켜보면 그리 틀린 통계도 아닌 듯하다. 그게 어디 말뿐일까? 온갖 표정으로 어르고 달래기를 수만 번, 그러는 사이 아기는 부모의 표정을 닮아간다. 그것은 ‘스며듦’이며 결국 비슷이 성장한다는 뜻이다. 하여 모든 이의 얼굴 속에는 부모의 얼굴이 들어있다고 본다. 생김생김만이 아니라 그 안의 정신까지도! 여기서, 우리 문학사의 한 봉우리인 이상李箱의 시 「얼굴」을 꺼내 보기로 한다.
배고픈얼굴을 본다.
반드르르한 머리카락 밑에 어째서 배고픈 얼굴은 있느냐.
저 사내는 어데서 왔느냐.
저 사내는 어데서 왔느냐.
저사내어머니의얼굴은박색薄色임에틀림이없겠지만저사내아버지의얼굴은잘생겼을것임에틀림이없다고함은저사내아버지는워낙은부자였던것인데저사내어머니를취聚한후로급작히빈곤해졌을것임에틀림없다고생각되기때문이거니와참으로아해兒孩라고하는것은아버지보담도어머니를더닮는다는것은그무슨얼굴을말하는것이아니라성품性品을말하는것이지만저사내얼굴을보면저사내는나면서이후대체웃어본적이있었느냐고생각되리만큼험상궂은얼굴이라는점으로보아저사내는나면서이후한번도웃어본적이없었을뿐만아니라울어본적도없으리라믿어지므로더욱더험상궂은얼굴임은즉卽저사내는저사내어머니의얼굴만을보고자라났기때문에그럴것이라고생각되지만저사내아버지는웃기도하였고하였을것임에는틀림이없을것이지만대체로아해兒孩라고하는것은곧잘무엇이나숭내내는성질이있음에도불구하고저사내가조금도웃을줄은모르는것같은얼굴만을하고있는것으로본다면저사내아버지는해외를방랑하여저사내가제법사람구실을하는저사내로장성한후로도아직돌아오지아니하던것임에틀림이없다고생각되기때문에또그렇다면저사내어머니는대체어떻게그날그날을먹고살아왔느냐하는것이문제가될것은물론이지만어쨌든간에저사내어머니는배고팠을것임에틀림없으므로배고픈얼굴을하였을것임에틀림없는데귀여운외톨자식인지라저사내만은무슨일이있든간에배고프지않도록하여서길러낸것임에틀림없을것이지만아무튼아해兒孩라고하는것은어머니를가장의지하는것인즉어머니의얼굴만을열심히숭내낸것임에틀림없는것이어서그것이지금은입에다금金니를박은신분과시절이되었으면서도이젠어쩔수없으리만큼굳어버리고만것이아닐까고생각되는것은무리도없는일인데그것은그렇다하드라도반드르르한머리카락밑에어째서저험상궂은배고픈얼굴은있느냐. <1931. 8. 15.>
신범순 수정확정판 『이상 시 전집 꽃속에 꽃을 피우다 2』(2017. 나녹. p.104-105)
2. 부모님의 선물_이름
앞서 읽은 이상의 시 「얼굴」에서보다 얼굴의 형성과정을 더 잘 표현할 능력이 필자에게는 없다. “금金니를 박은 신분과 시절이 되었으면서도” (···) “반드르르한 머리카락 밑에 어째서 저 험상궂은 배고픈 얼굴은 있느냐.” 이 마지막 문장 속에 “저 사내”의 일생과 “어머니”의 생애가 감쪽같이 겹쳐져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신의 선물인 얼굴은 정작 포장지에 불과했단 말인가. 표정이란 후험적 시간 속에서 새로이 채워져야/채워가야 할 텅 빈 상자였다는 의미인가.
장차 복된 ‘삶’이 도래하기를 소망하며 양친은 아기에게 가장 좋은 이름을 지어주신다. 그것은 신의 선물인 얼굴 이후, 부모님의 첫 번째 선물이다. 이름은 주문과도 같이 길흉을 담보하리라 믿으며 최대한 애정을 기울이기 때문이다. 어떤 이는 학자를 찾아가 금쪽같은 이름을 얻어오기도 하고, 작명소에서 찾기도 한다. 아기는 그 이름이 주어지는 순간 고유한 존재로서, 한 인간으로서의 희로애락을 얼굴 안쪽에 심어나가게 된다. 잠 속에서도 제 이름만큼은 귀에 선명하다.
필자는 아기였을 때 ‘마마’를 앓았다고 한다. ‘천연두’ 또는 ‘손님’이라고도 일컬었던 그 역병에 걸려 죽을 고비를 넘긴 이야기를 어머니한테서 들었다. 당시 농촌에서 쓸 수 있었던 방법은 다 동원했으나 효험이 없자 윗목에 밀어놨었다는데, 저녁 무렵 들춰보니 숨을 쉬고 있더라는 것이다. 아기를 포기한 게 아니라 푸대접해야만 손님이 빨리 떠난다는 속설을 믿었던 까닭이다. 오죽하면 병마를 두고 ‘손님’이라 칭했으랴만, 만백성의 간절한 마음에서 나온 표현이었으리라.
천연두란, 얼굴 전면이 곪았던 흔적으로 자잘한 흉터를 남기고 떠나는 게 상례常例다. ‘곰보’라는 명사 외에 대치어가 없어 여기 그대로 쓰자니 어딘가/누구에겐가 미안하고 안쓰러운 생각이 든다. (고운 단어 하나 지어야겠다) ···하여간 고약한 ‘손님’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필자는 얼굴에 아무런 흔적이 없다는 게 궁금했는데, 마흔이 넘은 어느 날 스승님으로부터 답을 얻었다. “마구 긁어대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성격에 빗대어 건넨 그 말씀이 이 겨울에도 따뜻하다.
아차, 얼굴이야 그렇다 치고 이름 석 자 가운데 맑을 숙淑자가 들어간 건 촌스러운 중에나마 다행이다. 맑음은 깨끗함과 바름의 뜻도 포함되므로 정신적 차원이 아닌가. 어쩌면 그 이름 기운으로 내 조촐한 삶이 지금껏 영위營爲되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신의 선물인 얼굴 안쪽에 늘 켜있기 바라셨을 맑음과 바름. 그는 올곧게 사신 부모님의 자식으로서 마땅히 간직하고 지켜야 할 정신이자 면목이다. 철들자 늙는다더니 이제야 ‘이름 불만족’을 ‘이름 만족’으로 수정한다.
얼굴에 맞물린 이름이란 각각의 상자에 붙여진 일련번호와도 같다. 모음과 자음의 조합인 형태의 이름은 동명이인이 빈발할 수 있지만, 숫자가 매겨진 명사라면 복수가 횡행할 리 없다. 천만리 떨어진 타국에서일지라도 이름을 보면 자연스레 한 얼굴이 떠오르고, 얼굴을 대할 때 역시 그의 이름을 연상하게 될 것이다. 이름이 얼굴이요, 얼굴이 곧 이름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구르는 잔 돌멩이도 제각각의 모습일진대, 이름에 새겨지는 얼굴이야말로 너나없이 고유하다.
3. 사회의 선물_주소
얼굴과 이름에 이어 떼려야 뗄 수 없는 자기증명의 요소로서 주소를 빠뜨릴 수 없다. 이를테면 얼굴-이름-주소는 언제 어디서나 붙어 다닌다. 얼굴이 신의 선물이고, 이름이 부모님의 선물이라면 주소는 사회적 선물이 아닐까 싶다. 사회는 우리를 재해로부터 보호하고 외부의 침입을 방어하며 경제적 이익을 도와 미래를 설계할 수 있도록 발전하는-그렇게 발전해야만 하는 또 하나의 자연이자 흐름이다. 우리는 그 경계 안에서 휘청거리며 뿌리내리며 울긋불긋 살아간다.
큰 틀에서 그런 지리적 구획을 국가라 할 것이다. 국가를 잃은, 즉 사회적 소속을 잃어버린 집단을 우리는 흔히 난민이라 부른다. TV 뉴스에서 종종 보아온 그들의 처참지경悽慘地境은 이루 필설로 형언키 어려울 정도다. 우리가 직접 벼농사를 짓지 않아도, 직접 바다에 나가 그물을 던지지 않아도, 울안에 닭장이 없어도 계란/계륵을 맛볼 수 있는 그 모두가 사회적 안전망시스템이 주는 혜택이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명제야말로 영원한 진리이다.
칸트식으로 말하면 순수이성과 실천이성과 판단력(오성)의 총합 아래, 개개인은 목표를 설정하고 심사숙고 분투하며 노櫓 저을 것이다. 따라서 그의 심리적/물리적 항적은 고스란히 인공지능 아닌 인간지능에 자동 저장된다. 그리고는 서서히 편집되어 행위자의 얼굴에 진선미를 드리운다. 모 기관에 제출할 이력서가 아니라면 스치는 얼굴만으로도 그의 아비투스(habitus)를 어느 정도 거니 챌 수 있다. 21세기에서의 얼굴이란 한 사람의 정보를 총망라하는 QR코드가 아닐까.
그러므로 누구를 막론하고 웬만큼 나이가 들면 자신의 이름과 얼굴을 연산해 볼 것이다. 어떤 대목에서 비뚤게 걷지는 않았는지, 혹 아직도 남은 아쉬움은 없는지. 얼굴과 이름은 기실 내 것이지만 타인에 의해 더 많이 지칭되고 호명된다. 나 자신을 인지/인식하며 평가하는 이도 내가 아닌 타인일 경우가 더 많다. 얼굴이야 늘 내 어깨 위에 있고, 이름 또한 내 주소에 딸려 있지만, 사회의 질서 안에서 가감승제 회자 되는 본질은 각자의 인의예지가 펼친 인간적 품성이며.
4. 자신의 선물_상징
한 사람의 이름이 ‘상징’이 되기까지는 하 오랜 세월을 거치게 될 것이다. 그때그때의 분노, 사랑, 아픔, 욕망, 좌절, 희망 등이 주름져 돌아온 거울 속 저 얼굴은 평생토록 사용한 이름의 대가임을 누구라 없이 겸허히 성찰해야 하리라. 자 , 이제 소크라테스의 “너 자신을 알라”라는 말씀 앞에서 나 자신을 찔러봐야 할 타임이다. 신神의 선물을 어떻게 아꼈는지, 부모님의 사랑에 조금이나마 보답했는지, 사회의 베풂을 얼마만큼 소중히 간직하고 그에 값하려고 마음 썼는지를.
어느 것 하나 제대로 공경하지 못했음이 자책을 요구할 따름이다. 오직 나 자신과 동물적 본능으로 내 자식만을 챙겨온 건 아닌지 부끄럽기만 하다. 열심히. 성실히, 끊임없이 노력한 건 사실이지만 그 자체를 덕성의 위치에 놓을 순 없다. 이 순간 ‘신의 사랑을 위하여’라는 작품을 다이아몬드로 제작해 바친 데미안 허스트가 떠오른다. 타고르의 『기탄잘리』, 릴케의 『두이노의 비가』 등등 이름에 값한 작품들 앞에 옷깃을 여밀 따름이다. 으아- 허무에 빠진 나의 ‘상징’은 무엇이란 말인가? 다만 필자의 근작시 「중견」을 실으며 이 원고를 마치려 한다.
깨끗한 이름 하나 풀어 쓰다 돌아가는 거
그것이 나의 남은 꿈이다
부모님이 골라주신,
깨끗한 이름
자식들이 의지했던,
가난한 이름
이웃들이 믿고 불러 주었던,
달 아래 하염없이 타오른 이름
산책로에 새소리 푸를 양이면
나무와 나비와 땅 위를 기는 벌레들까지
알아듣고 반겨준 그 이름 하나
유난히 솟을 것도 무너질 것도 없이 머리 흰, 이제
청청한 이름 하나가
내 생애 꽃이었노라
그렇게 놓을 수 있게, 그렇게 흐를 수 있게
전문, 『주변인과 문학』 2021-가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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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시인협회 사화집, 우리들의 얼굴 찾기 1 『나의 얼굴』에서/ 2022. 3. 22. <청색종이> 펴냄
* 정숙자/ 1988년『문학정신』으로 등단. 시집『하루에 한 번 밤을 주심은』『액체계단 살아남은 니체들』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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