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한 편

내가 사는 집/ 사공정숙

검지 정숙자 2022. 5. 5. 14:30

<수필>

 

    내가 사는 집

 

    사공정숙

 

 

  늦가을에 서울을 벗어나 세종으로 거처를 옮겼다. 겨울로 가는 길목이었지만 낯선 고장은 따뜻한 날씨로 우리를 맞아주었다. 신생 도시의 초입부터 만난 가로스는 나지막한 키에 볼품이 없었으나 가난한 가지마다 고운 단풍잎을 반쯤 매달고 있었다. 이제 하나, 둘 잎이 모두 떨어지면 나목으로 이어진 거리의 풍경은 쓸쓸해질 것이다. 그럼 나는 안으로 움츠러들 터이고, 둥지를 찾아드는 텃새처럼 새로운 보금자리에 더 잘 적응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집을 정돈하고 가꾸며 멋지게 생의 새로운 장을 열어 가는 꿈을 꾸었다.

  내 마음에 꼭 드는 집, 그림 같은 집을 짓고 사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원하는 조망을 갖추고 넓고 쾌적한 실내에 고급스런 가재도구로 장식하기란 소시민들에게는 그림의 떡이나 다름없을 것이다. 나 역시 이사한 집에서 못마땅한 곳이 여럿이었다. 전혀 손을 대지 않고 들어온 부엌은 식탁 자리가 애매하고 싱크대와 아일랜드 식탁의 상판은 볼 때마다 눈에 거슬렸다.

  과연 내가 원하는 집은 어떤 모습이어야 할까. 조선의 문인이자 사상가인 허균 자신이 살고 싶은 집에서 살지 못한 것 같다. 그래서 허균은 종에게 물감과 비단을 챙겨서 평양에 살고 있는 화가 이정에게 편지를 부쳤다. 편지의 내용은 자신이 구상한 집을 그려달라는 것이었다. 배산임수의 터에 자리한 집 한 채를 그리고 온갖 꽃과 무려 천 그루의 대나무를 심고, 괴석과 화분으로 뜰을 장식하고 동쪽 방에는 도서 천 권을 진열하고, 구리병에 공작새 꼬리를 꽂고 박산향로를 두고, 방 안 보료에 기대어 책을 읽으며 옆에서는 벗들이 담소를 나누고, 계집종이 술을 따르고 주렴 너머로 향이 피어오르는데 두 마리 학이 바위의 이끼를 쪼고, 빗자루로 꽃잎을 쓸고 있는 동자까지 그려주면 인생의 모든 것이 다 갖추어진 거라고 하였다. 그림으로라도 낭만 가득한 신선 같은 삶을 누리고 싶은 멸망이 담겨 있어 옛 선비의 호사취미를 열볼 수 있었다. 

  이사 계획이 잡혔을 때 딸은 먼저 서재를 꾸밀 것을 제안하였다. 내가 서재에서 마음껏 책을 읽고 글을 쓰면 좋겠다는 것이었다. 제대로 된 서재를 가져보지 못했기에 천 권의 책을 갖춘 허균의 로망인 꿈의 소재마냥 솔깃하였지만 금방 마음을 바꾸었다. 30대의 장성한 허균이 꿈꾸었던 집처럼 나도 젊다면 그런 욕심을 내어 보리라 싶지만 이젠 아닌 것 같았다. 서울 집의 책 가운데 아주 일부분만 가져와 그때그때 읽고 싶은 책, 필요한 책만 구해서 읽을 요량이었다. 거창한 서고 대신 작은 책상 하나만 들였다. 나는 이 작은 방이 책이나 다른 물건으로 채워지는 것이 부담스럽다. 물건이 가득하면 설사 귀한 책이라 하더라도 마음도 복잡해지기 마련이다. 오히려 복잡하고 생각이 많을 때 내 방에 들어오면 모든 것을 내려놓고 머릿속에서 제멋대로 불쑥 튀어나오는 망나니들이 잠재워지길 바라기 때문이다. 지식으로 채워지는 일은 다른 방, 다른 공간에서 해결하고 생각, 욕심, 불안과 집착들이 쉬어가고 버려지는 나만의 정자이자 쉼터 같은 곳으로 만들어가고 싶은 것이다.

  호사가인 허균과 사뭇 다른 18세기 조선을 대표하는 문인 이용휴의 글 「살구나무 아래의 집」으로 들어가 본다. 늙은 살구나무 아래 자리한 친구의 작은 집, 방은 손님이 오면 서로 무릎이 닿을 정도로 좁고 누추하다. 이용휴는 벗에게 말한다. "이 작은 방에서 몸을 돌려 앉으면 방위가 바뀌고 求道란 생각을 바꾸는 것이지. 생각이 바뀌면 따르지 않는 것이 없네. 내 말을 믿는다면 창문을 밀쳐주지. 웃는 사이에 벌써 밝고 드넓은 공간으로 올라갈 걸세." 이용휴는 가난한 집주인에게 마음먹기에 따라 비좁은 집도 무한한 공간으로 확대되어 간다고 말한다. 도를 닦는 데 집이 크고 방이 넓을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문을 열면 바라보이는 모든 정경, 우주까지 방 안으로 들여올 수 있다고 하였다. 맞는 말이다. 내가 바라보는 자연과 풍광은 모두 나의 것, 내게 주는 선물이다.

  책을 읽다가 눈이 피로하면 멀리 거실 창으로 들어오는 풍경을 담아본다. 초등학교와 중학교가 사이좋게 나란히 담을 맞댄 샛길 너머로 개울이 흐르고 산책로가 길게 이어져 있다. 돌다리를 건너면 작은 호수가 나오고  그 위로 더 큰 호수가 우아한 폐곡선의 궤적으로 푸른 심연을 감싼 채 놓여 있다. 그 호수에는 몇 마리의 왜가리와 가마우지가 산다. 호수 바닥에 어떤 물고기가 사는지는 아직 모른다. 밤이면 가로등과 도시의 불빛이 아른거리며 빛의 향연을 만들지만 달과 별의 운치에는 미치지 못한다. 우리 집 거실은 이용휴의 벗이 사는 방보다는 크지만 바라보이는 자연을 다 담기에는 작지 않을까 싶다.

  나는 허균이 욕망하는 집보다 이용휴의 집에 대한 생각이 더 좋다. 작지만 큰 우리 집, 우선 작은 내 방에서 나를 있는 대로 다 부려 놓을 수 있어서 좋다. 머릿속의 생각들을 다 끄집어내고, 헝클어진 실타래인 양 풀려나오는 것들을 모두 부어내어도 넘치지 않고 끄떡없을 작은 방이 점점 좋아질 것이다. 불만 가득했던 부엌도 세끼 밥상이 꼬박꼬박 차려지는 걸 보면 결코 좁지 않는가 보다. 게다가 거실 한쪽에는 성산 일출봉을 찍은 사진 속 풍경이 고개만 돌리면 다가온다. 떠오르는 붉은 해와 바다가 함께 걸려 있어 곧잘 먼 대양으로 헤엄쳐가는 상상을 하노라면 우리 집이 얼마나 광대한 세계로까지 확장되는지 모른다. 이제 반가운 사람을 만나면 이사 턱을 내도 좋겠다. ▩ (p. 269-2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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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월간문학』 2022-3월(637) <수필>에서

 * 사공정숙/ 1998년 『예술세계』로 수필 부문 2005년 『문학시대』 로 시 부문 등단, 시집 『푸른 장미』, 수필집 『꿈을 잇는 조각보』, 산문집 『노매실의 초가집』, 서울시 『도보해설 스토리』메뉴얼 북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