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나브로
강서일
소위 MZ세대나 포노사피엔스는 잘 쓰지 않는 이 말은, 처음에 얼핏 들으면 어느 외국어처럼 들리기도 하고, 시골 할머니들이 주로 사용하는 변방의 방언쯤으로 치부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 단어는 아름다운 우리나라 표준말이며, 시인이나 작가들에게는 낯설지 않은 어휘이다. '시나브로'를 국어사전에서 찾아보면, '모르는 사이에 조금씩 조금씩'이라는 부사이며 유의어는 '점차, 조금씩, 차차로'가 있다.
이런 시나브로는 내 추억의 한 조각을 단단히 물고 있다. 그것은 살아생전 어머니가 자주 입에 올리시던 말이기 때문이다. 무슨 일을 한꺼번에 급하게 처리하려고 허둥대거나, 얄팍한 꼼수를 지혜로 잘못 알고 행하려는 나를 두고서 어머니는 항상, "야야, 시나브로 해라, 시나브로. 그래야 오래할 수 있다"고 가르치셨다. 이 말은 우리 삶의 균형과 방향성을 담보하고 있다. 그저 천천히만 하라는 의미가 아니다. 차근차근히 하면서도 확실히 하라는 뜻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영어로 말하자면, Slowly but surely인 것이다.
외국인들이 가장 먼저 배우는 우리말 가운데 하나는, '빨리빨리'라고 한다. 그동안의 우리 사회는 그만큼 속도전이었다. 그 결과, 전후 개발도상국이었다가 선진국으로 편입된 나라는 지구촌에서 대한민국이 유일하다는 사실은 자부심을 가져도 좋을 만큼 대단한 일이다. 그러나 문제는, 지금도 그런 일이 관행처럼 도처에 남아 있어 애먼 희생을 강요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21세기 인공지능 정보화 시대에도, 서두를 때가 있고 천천히 돌아볼 때가 있는 법. 저 들판의 그늘진 꽃 한 송이도 저만의 시간이 필요한 것이다.
이제 시나브로 겨울이 물러나고, 봄이 사부작대며 우리를 찾아오고 있다. 지금부터라도 한 걸음씩 올바른 방향으로 꾸준히 힘을 쏟는다면, 우리들의 꿈도 분명 이루어지리라 믿는다. 그러니까 시나브로는 초고속으로 올라가는 마천루의 주춧돌 같은 것이다. ▩ (p. 16)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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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학의 집 · 서울』 2022-3월(245)호/ <내가 사랑하는 우리말 우리글> 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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