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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르난두 페소아『불안의 서』/ 209 : 배수아 옮김

검지 정숙자 2022. 2. 16. 03:00

 

    209

    페르난두 페소아 : 배수아 옮김

 

 

  함께 일하고, 함께 행동하고, 다른 사람들과 늘 함께한다는 것은 형이상학적 시각으로는 병적인 충동에 해당한다. 모든 개인에게 주어진 영혼은 타인들과의 관계로 인해 고통받아서는 안 된다. 존재한다는 신적 사실은, 공존한다는 사탄적 사실에 점령되어서는 안 된다.

  내가 타인들과 공동으로 행동한다면, 최소한 나는 한 가지를 잃게 된다. 그것은 혼자서 행동하기다.

  다른 사람에게 내 속마음을 털어놓는다는 건 나를 작게 만드는 것이다. 비록 겉으로는 나를 크게 만드는 행위처럼 보일지라도 말이다. 함께 산다는 것은 죽는 것이다. 내 자의식만이 나에게는 실제다. 이 자의식 속에서 다른 사람들은 모두 불확실한 현상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 타인들에게 현실적인 실제를 부여한다는 것은 질병에 가깝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고집을 관철시키려 하는 아이들은 신과 가깝다. 이들은 존재하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우리 성인들의 삶은 자선행위에 한정되어 있다. 우리 모두는 타인들의 자선에 기대어 살아간다. 우리는 우리의 개성을 공존의 난장으로 탕진한다.

  모든 말해진 말이 우리를 배반한다. 유일하게 만족할 만한 의사소통의 형태는 글로 작성된 말이다. 그것은 영혼과 영혼을 잇는 다리의 석재가 아니라 별들 사이의 광선이기 때문이다.

  설명한다는 것은 믿지 않는다는 것이다. 모든 철학은 영원의 (···) 기호 아래 움직이는 외교사절이다. 외교사절과 마찬가지로 철학 또한 본질상 위조된 사물이다. 이때 사물은 사물 자체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철저하게 목적을 위해서 활용되는 어떤 것일 뿐이다.

  시를 발표한 시인에게 가장 위엄 넘치는 운명은, 그에게 타당할 법한 명성에 도달하지 않는 것이다. 진실로 더욱 위엄 있는 운명은 시를 아예 발표하지 않는 것이다. 하지만 이 말은 그가 시를 쓰지 말아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시를 쓰지 않으면 그는 시인이 아닐 테니까. 내가 의미하는 것은 천성이 시인이므로 시를 쓰는 시인, 하지만 정신적 체질로 인하여 자신이 쓴 것을 발표하지는 않는 그런 시인이다.

  쓴다는 것은 꿈을 만질 수 있는 형태로 바꾼다는 것이다. 쓴다는 것은 우리의 창조적 특성에 대한 가시적 보상(?)으로서 하나의 외부세계를 만들어낸다는 것이다. 출간한다는 것은 이 외부세계를 타인들에게 준다는 것이다. 그러나 타인들과 우리가 공유하는 외부세계가 이미 진짜 외부세계라면, 가시적이고 만질 수 있는 질료의 세계가 왜 필요하겠는가? 내 안에 있는 우주가 타인들에게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p. 371-3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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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페르난두 페소아 | 배수아 옮김 『불안의 서에서/ 초판 2014. 3. 27. 초판 10쇄 발행 2018. 5. 10. <봄날의 책> 펴냄.

 * 페르난두 페소아(Fernando Pessoa 1888-1935, 47세)/ 1888년 포르투갈 리스본에서 태어나 양아버지가 영사로 근무하던 남아프리카 공화국 더반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열일곱 살 때 리스본으로 돌아와, 1935년 그곳에서 일생을 마칠 때까지 무역통신문 번역가로 일하며 눈에 띄지 않는 평범한 삶을 살았다. 생전에 그는 몇 권의 시를 발표했을 뿐, 작가로서 거의 활동을 하지 않았다. 그의 사후 발견된 유고는 시와 드라마 초고, 정치적 에세이 등 모두 27,543매나 되었다. 그중 1982년 출간된 유작 산문집은 문학계에 엄청난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오늘날 그는 포르투갈 현대문학에서 가장 중요한 작가로 손꼽힌다.

  * 옮긴이 배수아/ 소설가이자 번역가, 지은 책으로『푸른 사과가 있는 국도』『바람인형』『뱀과 물』(소설집), 『철수』(중편소설), 『일요일 스키야키 식당』『에세이스트의 책상』『올뺴미의 없음』『독학자』『알려지지 않은 밤과 하루』(장편소설) 등이 있고, 옮긴 책으로『불안의 꽃』『나 여기 있으리 햇빛 속에 그리고 그늘 속에』『인간과 말』『눈먼 부엉이』『꿈』『현기증, 감정들』『대심문관의 비망록』『자연을 따라, 기초시』『산책자』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