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슬받이*
임금희/ 수필가
이슬이 내려온 길을 걷듯이 그렇게 살았을 것이다.
아침안개가 걷히는 길 속으로 이슬에 맺혀 있는 오솔길을 걷다보면 신발이 젖고 종아리는 축축하고 풀들이 엉겨 붙었다. 그렇게 발을 적시며 학교를 다녔다. 구불구불 이어진 이슬받이를 걷고 또 걸으며 벗어나고 싶었다. 그 길 어딘가에서 나무가 자라고 꽃이 피어나고 풀이 돋다나고 있었는데 그때는 그저 발이 젖는 것이 싫었다. 소박하면서도 묵묵한 나무들이,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이름 모를 풀들이 이슬을 먹으며 커가는 걸 몰랐다. 눈길은 그저 산 너머 먼 곳을 바라보았다. 널찍한 한길처럼 발이 젖지 않는 길을 다니고 싶었다. 한번은 친구 집에 놀러갔다가 컴컴해질 때 그 길을 갔던 적이 있다. 짧아진 해를 잊고 있었다. 무서움을 누르고 달렸다.
이제는 눈을 감고 이슬받이를 그려본다. 밤 벌레의 울음소리를 들으며 달렸던 길을 잊지 않으려 떠올린다. 그때는 쳐다보려 하지 않던 것을 애써 그리고 있다. 가슴에 시간 위를 달리는 생각이 들어차 있다. 내게 청춘은 공상과 함께였다. 눈을 뜨면 사라져버리는 공상을 왜 품고 살았는지 이제야 알았으니······. 먼 곳 바라보기는 여전해서 창밖 보기를 좋아한다. 미지의 세상 찾기처럼 궁금하다. 날이 맑을 때는 창밖으로 보이는 산이 동심으로 돌아가게 하고 미세먼지로 흐릿할 때에는 보이지 않는 저 너머를 꿈꾸었다. 창밖은 잡을 수 없는 아지랑이처럼 희미해지다가 말짱 도루묵 같은 공상으로 이끌기도 했다.
결혼 후 아이들을 기르며 가정사와 육아에 묻혀서 공상은 잊고 살았다. 무엇이든 느린 편이라 일이 늘 밀려 있었다. 가끔 창밖을 보면서 한숨이 나오기도 했다. 창 안은 나의 조그만 세상이고 창밖은 무궁무진해 보였다. 보이지 않는 것들, 경험이 없거나 시작하지 않은 것들이 창밖에는 있었다. 추억이 있었고 문학이 있었고 반짝이는 별들이 박혀 있었고 여행이 있었다. 눈으로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지만 존재하는 것. 그 속에서 막연한 설렘과 도전의식을 느낀다. 그것들을 내면으로 삼킬 때 그 추상적인 단어는 내게 현실이 되어 다가온다.
어느 날 창밖으로 바라만 보던 미지의 세계로 성큼 나섰다. 늦둥이 아이도 제법 컸으니 나를 위한 무언가를 하고 싶었다. 그것이 글을 쓰게 된 계기였다.
결혼하면서 누구의 아내로, 한 집안의 며느리로, 아이의 엄마로만 강산이 변하도록 살았다. 나를 위한 시간이 있었던가. 할일이 많아서 나를 생각할 틈이 없었다. 가정에서 어느 정도의 책임을 완수하고 내 이름을 찾고 싶었던 것이다. 문학을 처음 시작하게 된 그 시간이 잊지 못할 시간이 되었다. 공상은 날개를 달고 촘촘히 반짝이며 내 손으로 들어오고 있다.
시간의 가을 끝자락 그 언저리에서 길을 되돌아보며 깨닫는다. 아직도 이슬받이 위를 걷고 있다는 것을······. 이슬은 시련같이 엉겨 붙지만 그 또한 소중한 것임을 깨닫는다. 같이 그 길을 걸었던 친구들은 다들 무얼 하며 지내고 있을까.
햇빛 들어오는 거실에서 책을 읽는다. 늦은 오후 빛 한 줄기는 퍽이나 따사롭다. 빛은 들어와 나를 감싸고 벽을 환하게 하더니 성모상을 비추다가 서서히 줄어들기 시작한다. 책을 읽다가 빛을 바라본다. 짧은 해를 아쉬워 한다. 늦은 오후 빛 한 줄기에 내 몸이 환하고 마음이 따스해진다. 서서히 어둠이 집 안을 적막하게 가라앉히는 모습에 집중하다보면 어느새 컴컴해진다. 불도 안 켜고 거실에 앉아서 읽다만 책을 바라보았다. 어둠이 어느 사이에 거실을 점령했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여유이다. 밤이 오는 것을 그렇게 느껴본다.
삶이 참 힘들고, 기쁘고, 고통스럽기도 했는데 저녁에서야 돌아본다. 이제는 책과 글을 보면서 밤을 지내려 한다. 이슬받이는 덤이다. 긴 밤이 될지도 모르지만 문학과 함께라면 참 아름다울 것 같다는 생각을 한다. ▩
* 이슬받이: 이슬이 내리는 무렵. 양쪽 길섶에 이슬 맺힌 풀이 우거져 있는 좁은 길.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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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학의 집 · 서울』 2021-12월(242)호/ <수필> 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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