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메테우스
장상용
'전지전능全知全能.'
이 단어에 어울리는 자는 인간 중에 없습니다. 오로지 이 단어는 신神을 수식하거나 지칭하기 위한 표현으로 존재해왔습니다. 인간은 신의 전지전능을 한편으로는 두려워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부러워해왔습니다. 이것이 종교의 기원 아닐까 생각합니다.
신의 관점에서 짐승이나 다름없던 인간은 이제 신의 권능에 도전하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철학자 니체가 "신은 죽었다"고 선언함으로써 신에게 사형선고를 내린 것도 오래 전의 일입니다. 프랑스대혁명 당시 평민 출신의 검사 로베스피에르가 '태양왕' 루이14세를 상징하는 절대왕정의 후예인 루이16세 부부, 왕족과 귀족들을 단두대에 세운 것처럼 말입니다.
전지전능한 신들은 쇠락한 왕족과 귀족처럼 사라졌지만, 그들 중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존재가 있습니다. 진흙으로 인간을 빚고, 인간에게 불을 전해준 프로메테우스입니다. 과거의 신 대부분이 인간을 보호하거나 구해준다는 명목으로 무한대의 섬김을 요구했습니다. 인간에게 엄청난 청구서를 내밀었던 셈이죠. 인간은 거절할 힘도, 의지도 없었습니다. 사후 지옥불에 던져버린다는 데 어찌 하겠습니까? '미리 생각하는 자'라는 뜻을 가진 프로메테우스는 인간을 불쌍히 여겨 아무 대가 없이 인간에 필요한 모든 것을 전해주었습니다. 자신이 혹독한 대가를 치를 것을 알면서도 감내했습니다. 제우스는 그를 코카서스 절벽 꼭대기에 청동 쇠사슬로 묶은 후 독수리들이 매일 그의 간을 쪼아 먹도록 했습니다. 그리스 비극 작가 아이스킬로스의 <결박당한 프로메테우스>에서도 제우스의 협박에 의연했던 그를 영원한 저주 속에 내버려둘 수 없던 그리스인들은 3만 년 후 프로메테우스가 헤라클레스에 의해 풀려난다는 에피소드를 덧붙였습니다.
이 세상 어떤 신도 프로메테우스만큼 인간에게 헌신하지 않았습니다. 18세기 계몽주의와 질풍노도(Sturm und Drang)가 전 유럽을 휩쓸자, 낭만주의 시인들은 '반항아' 프로메테우스를 영웅으로 떠받들었습니다. 괴테(1749-1832, 83세 )는 '인간 해방'의 선구자 프로메테우스의 입을 빌어 전지전능한 신들에게 충격 선언을 합니다. 그 시가 바로 <프로메테우스>(1773)입니다.
제우스여 그대의 하늘을
잿빛 구름의 안개로 덮어라!
···
신들이여 태양 아래서 너희들보다
가련한 존재는 없으리라.
너희는 비겁하게도
희생물로 바친 재물이나
기도의 한숨으로
너희의 위엄을 키우고 있을 뿐
어린이나 거지 같은 인간들이
어리석은 소원을 아뢰지 않는 한
너희는 굶어죽을 수밖에 없으리라.
···
왜 그대를 숭상하라 하는가,
그대는 한 번이라도 무거운 짐을 진 인간의
괴로움을 가볍게 해주었던 일이 있었던가
그대는 한 번이라도 고뇌로 몸부림치는 인간의
눈물을 씻어즌 일이 있었던가.
···
나는 여기 앉아서
내 모습 그대로의 인간을 만드노라
나를 닮은 종족을 만드는 것이다.
괴로워하고 울고
즐거워하고 기뻐하며
그리고 그대 따위는 숭상하지 않는
나와 같은 인간을 만드노라.
-괴테 作, (1773)-
이 시를 제우스와 올림포스의 신들이 읽었다면, 그들의 심장은 멎지 않았을까요? 프로메테우스의 입을 빌고는 있지만, 괴테의 시는 인간이 더 이상 신을 섬기지 않겠다는 결별 선언에 다름 아닙니다.
그래서일까요? 신들이 누리던 과거의 영광은 온 데 간 데 없습니다. 피조물이던 인간이 생명체를 창조하며 창조주의 대열에 들어섰습니다. 어찌 보면 21세기의 인간이 우주를 다스려야 하는 야훼, 제우스, 오딘, 알라, 브라흐마 등과 그 일족보다 더 재미있게 사는 듯합니다. 부와 쾌락이 흘러넘치고, 샴페인이 터지는 신화를 다시 읽어보고자 합니다. 괴테의 시대와 달리, 인간은 전쟁과 기아에서 벗어난 창조주에 가까워졌습니다. 프로메테우스는 창조주의 중요한 자질을 간과하지 않았습니다. 피조물에 대한 책임입니다. 인간은 끊임없이 '전능全能'에 도전하면서도 그에 따르는 책임을 도외시합니다. 그러한 탐욕으로 인해 지구는 급속히 파괴되어가고, 정체를 알 수 없는 역병이 수시로 돌고 있습니다. 언젠가 인간이 마음 놓고 숨 쉴 땅 한 오라기도 없어진다면, 프로메테우스는 과연 무어라고 말할까요? '내가 이러려고 인간을 해방했나?'라는 그의 탄식을 들을 때는, 너무 늦을지 모릅니다. ▩ (p. 198-201)
* 블로그주: 본 블로그에 위의 시 '프로메테우스' 전문도 수록되어 있습니다. "프로메테우스/ 괴테/ 김재혁 번역" 으로 검색 가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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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엠포엠』2021-가을(91)호 <장상용의 라임라이트 · 39>에서
* 장상용/ 문화콘텐츠학 박사, 한국 외국어대 대학원 러시아 문학 전공, 일간스포츠 만화와 문화 전문기자, EBS 스토리 코치, 한국문화콘텐츠진흥원 스토리텔링 온라인 강사, SICAF(서울국제만화애니메이션피스티벌) 큐레이터 등을 지냈다.『전방위 문화기획자를 위한 스토리텔링 쓰기』『프로들의 상상력 노트』『내가 펜이고 펜이 곧 나다』『CEO, 만화에서 경영을 배우다』『사랑책』등의 책을 썼다. 전) 한국만화영상진흥원 부천국제만화축제(BICOF)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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