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움은 구원인가
손기찬/ 건축가
얼마 전 LH공사 사건이 뉴스에 도배된 적이 있다. 그중 빗금 그물망으로 아름답게 장식되고 날렵하게 마무리된 본사 사옥의 외관이 도리어 나의 시선을 불편하게 하였다. 지방의 들판에 우뚝 치솟은 건물의 수려한 자태는 업무시설로서 어떤 역할을 하고 있고 또 공공성으로서 무슨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 불쑥 펼쳐진 사건과 자꾸만 겹쳐 보인 것은 과민한 반응일까? 이 건물을 꼭 집어서 비평하고자 함은 결코 아니다. 사실 전국 대부분의 신청사들이 하나같이 주변 환경과 더불어 좋게 하기보다 오히려 주위를 빈곤하게 함으로써 상대적으로 좋게 부각되는 경쟁에 나란히 하고 있다. 아름다운 건축물들이 다수의 보편성으로나 신사조로 정당화하겠지만 내가 보기에는 불완전해 보인다.
지나간 예술평론가 존 러스킨(John Ruskin, 1819-1900, 81세)은 "우리들을 기쁘게 하는 것은 지어진 건물의 아름다움보다는 건축에서 접하게 되는 선택과 창안이다"라고 하였다. 우리의 건축에서 내면의 아름다움을 추구하기보다는 외장의 현란함이나 치장의 기민성으로서 과시적인 성과를 뽐내고자 하는 노력으로 완성되었을 그 결과물은 왜 모두 비슷하게, 여전히 반복되고 있는지 질문해보지 않을 수 없다. 성산대교 난간의 조형성이 여전히 아름다움의 가치를 유지하고 있는지? 물론 여기서 시대, 사회, 문화현상을 가린 채 명쾌한 답을 얻고자 함은 어리석은 질문일 수밖에 없다. 사람 또한 아름다움을 가릴 때 외모 위주로 판단하는 것이 잘못이라고 한다. 그런데 아름다움을 겨루는 미인대회에서 왜 진眞, 선善, 미美의 순서로 뽑는 것인지? 이는 순위 매김이 아니라고 할지 모르지만 아름다움을 도외시하고 진선미의 순서를 바꿀 수 있는지? 심사기준이 당연히 외모와는 다르다는 미학적 평가로 이루어지겠지만 진선미로 선택되는 결과는 무엇인지?
미도 인간이 만든 하나의 개념이지 실체가 아니다. 미학을 논하는 철학자들도 미의 개념에서 미적 경험의 본질을 규명하는 데 치중하고 있다. 미 또는 예술 그 자체를 시각으로만 보는 것이 아니라 다의적인 개념으로 접근하고 있다. 과학철학자 가스통 바슐라르(Gaston Bachelard, 1984-1962, 78세)는 『공간의 시학』에서 "거소의 지나치게 화려한 외관은 그것의 내밀함을 가려놓을 수도 있다"고 하여 건축의 상상력까지 불러온다. 그러므로 어떤 건물의 아름다움을 묘사하는 것은 단순히 심미적으로 좋다는 뜻 이상이다. 가장 깊은 수준으로 보자면, 미는 보이지 않는 예술적 의미를 지녀야 한다는 것이다. "화가나 시인이 그가 세상과 직접 마주하는 것 이상 무엇을 표현할 수 있다는 말인가"라고 철학자 메를로 퐁티(Maurice Merleau Ponty, 1908-1961, 53세)는 현상학적 신념으로 되묻는다. 건축은 이와 같이 단순히 건축의 외관으로 드러내기보다는 사용자가 살아가는 물리적 공간일 뿐만 아니라 삶의 가치와 의미를 담아내는 상징적 장소이다. 실질적으로도 건축 작품은 그 자체로 무엇인가를 말해주지 못한다면, 실용성을 배제하고서라도 엔트로피의 증대만은 자명한 일이다. 건축이란 시각적으로 성립되는 형식예술이긴 하지만, 미학적 감수성의 탐구로만 만족한다면? 작품을 만드는데 생산, 소비 또는 이용에 있어서 다시 말하면 건축의 본질은 사회적, 물리적 해답의 중간에 위치하여 다원적 가치를 지니는 것이다. 더욱이 다른 예술작품과 달리 건축의 곤혹스러운 점은 원 상태로 되돌리기 어려운 데 있다. 논리 철학자 비트겐슈타인(Ludwig Josef Johann Wittgenstein, 1889-1951, 62세)은 누이를 위한 집을 지으려고 3년 동안 학계를 떠났었다. 그 일이 생각보다 엄청나다는 것을 깨달았는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여러분은 철학이 어렵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내가 장담하건대 훌륭한 건축가가 되는 어려움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라고 실토했다. 이 말은 항상 나에게 자책과 동시에 위안이 되고 있다. ▩
(건축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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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학의 집 · 서울』 2021-12월(242)호/ <예술의 세계 건축> 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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