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의 황금시대
장상용/ 문화콘텐츠학자
세계의 많은 신화는 황금시대를 그리워하고 예찬합니다. 모든 것이 완벽했던 황금시대를 지나 세대를 거듭할수록 타락하거나 퇴보했다는 사고입니다. 로마 시인 호라티우스는 <세기의 찬가>에서 "우리 할아버지 세대보다 더 나빠진 아버지 세대는 우리를 자기들보다 더 나쁘게 만들고, 우리보다 더 나쁜 자식 세대를 낳게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자고 나면 경천동지할 과학기술의 혁명이 쏟아지는 21세기의 시각으로는 동의하기는 어렵지만, 자기가 살고 있는 현시대에 대한 불만이 황금시대를 소환하지 않나 생각해봅니다. 실존했던 황금시대라면 또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눈에 보이도록 국가가 부강해지고, 문화가 융성해지는 시대. 아마도 그런 황금시대를 가장 그리워하는 국가는 유럽 변방국으로 몰락한 스페인 아닐까요? 한때 세계에서 가장 많은 금과 은이 흘러 넘치고, 무적함대가 바다를 지배하고, '해가 지지 않는 나라'라고 불리던 황금시대가 실존했으니까요.
그 시기는 카스티야의 여왕 이사벨 2세와 아라곤 왕국의 페르난도 2세가 결혼해 스페인 북부를 통합하고 남부에서 아프리카 무어인이 지배하던 이슬람 왕국을 축출한 1492년부터 유럽 30년 전쟁이 시작된 1618년 이전까지로 볼 수 있을 듯합니다. 스페인 문학도 황금시대로부터 전세계 문학사에 획을 그은 두 개의 유산, 즉 미겔 데 세르반테스의 소설 『돈 키호테』(1605)와 티르소 데 몰리나의 희곡 『석상에 초대받은 세비야의 유혹자』(1642)을 물려받았습니다.
『돈 키호테』는 중세의 기사와 기사도를 부활시켜야 한다는 사명으로 편력기사의 길을 떠나는 노인 돈 키호테의 주장은 시대착오적일지 모릅니다. 스페인이 황금시대로 접어든 후 쓸모가 없어진 무리가 기사였으니까요. 총 · 포의 활용이 다양해진 근대 전쟁에서 무거운 철갑에 말과 창으로 무장한 기사는 설 자리를 잃었습니다.
그럼에도 돈 키호테가 "제 소망은 이미 죽어버린 기사도를 부활시키는 데 있습니다."라고 거듭 주장하는 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는 "저(기사)의 본업이 본래 힘없는 자를 도와주고, 억울하게 당한 자들의 원수를 갚아 주고, 의롭지 못한 자들을 벌주는 것이외다."라는 말로 기사도 정신을 강조합니다.
그러면서 그는 감회에 젖은 채 황금시대를 회상합니다.
"그 거룩한 시절에는 모든 것이 공유물이었지요. ··· 정의는 그 영역 내에 딱 버티고 있어서 이해타산이 있는 자가 오늘날처럼 더럽히고 흐트러뜨리고 박해하는 따위의 짓은 감히 저지를 생각도 못하였소."
이 말에 따르면 돈 키호테가 생각하는 황금시대는 빵 한 조각도 나누고 정의가 살아있는 시대였습니다. 황금시대에 비하면 돈 키호테가 발을 붙이고 산 시대는 콜롬부스의 신대륙 발견 이후 물질적인 부가 흘러 넘치고 신무기와 과학기술이 지배할지언정 부패하고 타락했으며, 정의를 추구하는 기사도 정신 · 본질은 지금도 유효하다는 것입니다. 그는 편력기사 여행길에서 고용인에게 임금을 뜯기고 매질까지 당하는 청년을 구해주기도 하고, 쇠사슬에 묶인 죄수들의 사연을 일일이 들어보기도 합니다. 그 과정에서 무자비하게 봉변을 당하지만, 얻어맞아 이빨이 빠지는 것도 개의치 않습니다. 돈 키호테는 단순히 기사도에 미친 노인이 아니라, 행동으로 세상을 바꾸고 황금시대를 되돌려놓으려 한 인물로 볼 수 있습니다.
<석상에 초대받은 세비야의 유혹자> 주인공은 "바람둥이의 대명사' 돈 후안 테노리오입니다. 전설적인 인물을 문학적 형상으로 창조해낸 작가는 수도자였던 몰리나였습니다. 그는 1616년 메르세드 종단의 신대륙 선교 사업의 일원으로서 에스파놀라 섬(현재의 도미니카 공화국)에 파견되는 등 신학 연구자의 길을 걸었습니다.
그가 희대의 바람둥이 돈 후안을 형상화해낸 이유는 타락하고 방종한 삶에 대한 경고의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돈 후안은 거짓 약속으로 여인들의 몸과 마음을 빼앗은 후 도망가고, 결혼 하루 전날의 신부마저 자기 것으로 만든 후 자취를 감춥니다. 그로 인해 파탄 상태에 이른 사람들의 참담함을 즐거워합니다.
"여자를 유혹하는 것은 내게는 오래도록 몸에 밴 습관"이라고 말하는 그의 행태를 보면 '바람둥이'라기보다는 '악당'에 가깝습니다. 그의 몸종인 카탈리논은 "농락하는 자는 반드시 농락당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라고 경고하지만, 그는 조금도 개의치 않습니다. 돈 후안이 이토록 파렴치하게 된 것은 황금시대와도 무관하다 할 수 없습니다. 돈 후안은 카스티야 왕 돈 알론소의 총애를 받는 아버지를 둔 세비야의 백작이었습니다. 그의 삼촌은 나폴리 주재 스페인 대사입니다. <석상에 초대받은 세비야의 유혹자> 텍스트에서는 스페인 카스티야 왕국의 국제적 영향력이 느껴집니다. 황금시대의 부강한 국력과 권력을 후광으로 업은 돈 후안 백작은 어떤 계급의 여인을 가리지 않고 농락합니다. 심지어 그의 범죄가 들통나도, 아버지나 삼촌이 무마하고 왕은 벌을 주는 척만 합니다.
면책특권을 가진 돈 후안은 점점 겁이 없어집니다. 그는 신조차도 우습게 여깁니다. 못된 행동의 결말은 지옥일 것이라는 경고에 대해 그는 "올 테면 오라지. 참 오래도록 나를 지켜바 주시네,"라고 비꼽니다.
돈 후안은 자신이 찔러 죽인 기사장(長) 돈 곤살로의 무덤에 우연히 이르고 그의 석상을 비웃으며 자신의 식사에 초대합니다. 실제로 그 석상이 돈 후안의 저녁자리에 온 후, 자신의 식사에도 초대합니다. 겁을 상실한 돈 후안은 전갈이 우글거리는 식사자리에서 석상의 손은 잡은 후 불태워지며 최후를 맞이합니다.
스페인의 황금시대는 고집스럽게 가톨릭 순혈주의를 고집한 왕들이 스페인 내 신교도, 유대인, 이슬람인들을 박해한 후 막을 내렸습니다. 또한 돈 키호테와 돈 후안이라는 두 세기적 인물을 남긴 채. ▩ (p. 178-1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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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엠포엠』2021-rudnf호 <장상용의 라임라이트 · 40>에서
* 장상용/ 문화콘텐츠학 박사, 한국 외국어대 대학원 러시아 문학 전공, 일간스포츠 만화와 문화 전문기자, EBS 스토리 코치, 한국문화콘텐츠진흥원 스토리텔링 온라인 강사, SICAF(서울국제만화애니메이션피스티벌) 큐레이터 등을 지냈다.『전방위 문화기획자를 위한 스토리텔링 쓰기』『프로들의 상상력 노트』『내가 펜이고 펜이 곧 나다』『CEO, 만화에서 경영을 배우다』『사랑책』등의 책을 썼다. 전) 한국만화영상진흥원 부천국제만화축제(BICOF)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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