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한 편>
목욕탕집 할머니
지연희/ 수필가, 시인
길 하나만 건너면 대중목욕탕이 보인다. 어느 땐 내 집 창밖으로 목욕을 하기 위해 왕래하는 사람들을 바라보고 어느 땐 주인이 조그마한 유리창 밖으로 우리 집 현관에 출입하는 사람들을 바라본다. 의식적이거나 무의식 중에 양쪽 집 사람들은 시시각각 상대성 관심사가 되어진다. 가끔씩 외출을 하기 위해 현관을 나설 때에도 나는 목욕탕집 출입구 쪽으로 시선을 보낸다. 은연중에 나의 외출을 알리고자 하는 행위와도 같다. 그 쪽에서 바라보는 이쪽의 가장 큰 관심사는 무엇인지 모르지만 내가 목욕탕 쪽으로 관심을 보이는 대상은 어느 하루도 모습을 감추지 않는 그 댁 주인 할머니의 출입이다.
조그마한 체구의 앙상한 뼈마디가 드러난 체형의 할머니는 매우 부지런한 분이었다. 몇 개월 전만 해도 목욕탕의 모든 일을 손수 관리하시며 손님들에게 물을 많이 쓴다 나무라시고, 너무 오래 목욕을 하는 사람은 건강에 해롭다며 애꿎은 사람들을 꾸짖기도 하셨다. 욕실에 들어와 하수구에 막힌 머리칼을 떼어내기도 하고 하고 아무렇게나 늘어 놓인 목욕용기를 정돈하시던 할머니다. 그 할머니가 요즘은 전과 같지 않다. 한 평 남짓한 목욕탕 출입구에 딸린 문간방에 앉아 목욕요금을 받던 일도 한참 전이고 언제부턴가는 누구도 알아듣지 못하는 말씀을 혼자 중얼거리기 시작하셨다. 가을 햇볕 비치는 목욕탕 밖 층계에 힘없이 앉아 손가락을 만지작거리며 역시 알아듣기 힘든 말씀을 끝없이 하시곤 한다. 할머니의 모습이 예전 같지는 않지만 어느 하루도 어김없이 할머니는 목욕탕에 가신다.
오늘은 세면도구를 챙겨들고 목욕탕으로 뛰어갔다. 우리 집 쪽으로 창문이 달린 방에서 할머니의 손자며느리가 요금을 받고 있었다. 의식적으로 두리번거리며 할머니를 찾았다. 탈의실 쪽으로 들어서자 할머니는 소파에 앉아 계셨다. 예전 같으면 무슨 말씀이든 한 마디쯤 건네주셨을 분이지만 소파에 등을 기댄 채 고개를 한쪽으로 기울이고 한낮의 깊은 잠에 취해 계셨다. 지난번에도 그같은 모습으로 앉아 계시더니 오늘도 다름없는 모습이다. 할머니는 어느 날부턴가 기력을 잃은 듯 뵈인다. 벌써 몇 번째 전신의 맥을 풀고 계신 할머니를 목격하고 있다. 탕 속에 들어와 젊은 사람 못지않게 물살을 헤치며 물속을 걷기도 하셨지만 요즈음은 그 모습을 뵐 수가 없다. 좀 더 가까이 할머니 곁으로 갔다. 굵은 주름살이 얼굴 전체에 파도처럼 일렁이고 있었다. 소매 끝으로 드러난 손등의 주름살도 다섯 갈래의 뼈와 뼈 사이로 축 늘어져 뵙기가 안쓰러웠다.
아주 짧은 기간에 일어난 할머니의 변화가 무심하게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자리에 누워 계실 만큼 병고에 시달리지는 않지만 할머니는 분명 당신의 삶 속 새로운 변화의 지점에 머물고 계신 게 분명했다. 누구나 거쳐야 할 굴곡의 인생길이지만 지금 할머니가 맞고 계신 부분은 예사롭지 않아 보인다. 당신이 걸어오신 팔순의 연륜만큼 삶의 무게를 한몸에 안고 계신 할머니의 모습은 앙상한 겨울 나목처럼 쓸쓸하기만 하다. 할머니는 꿈을 끄듯 여전히 눈을 감고 계셨다. 몸을 다 씻고 탈의실에서 나왔을 때도 할머니는 소파에 앉아 계셨다. 의식이 없는 사람처럼 조용히 눈감고 계셨다.
목욕탕을 빠져나와 건너갔던 차도를 다시 건너 내 집 인도에 닿았다. 늦가을 바람이 젖은 머리칼을 매섭게 살갗을 때렸다. 이어 나이 든 플라타너스 가로수 밑으로 손바닥보다 큼직한 마른 잎 하나가 뚝 떨어져 맨발의 슬리퍼 위에 멎었다. 누렇게 퇴색된 플라타너스 잎이었다. 젊은 날 씩씩하게 잎과 살 전체에 자양분을 공급하던 푸른 실핏줄의 잎줄기는 앙상한 뼈처럼 드러난 늙은 노인의 모습이었다. 순간 목욕탕집 할머니의 주름진 얼굴이 떨어진 마른 잎 위에 내려앉았고 손등의 주름살도 함께 와 놓였다.
가로수 밑에 서서 건너갔던 목욕탕집 출입구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여전히 소파에 앉아 눈을 감고 계실 할머니를 생각했다. 나무는 한 번 터를 잡고 뿌리를 땅 속에 뻗으면 평생을 제자리에서 떠날 줄 모른다. 백 년이든 천 년이든 온갖 풍상을 견디며 한 해 한 해 연륜을 쌓는다. 비바람 폭풍우도 눈보라치는 삭풍의 겨울도 의연히 견딜 줄 아는 삶을 산다. 아기 눈망울 같은 새싹을 틔우고 무성한 잎을 키운 다음 열매를 거두고 한 평생의 삶을 자연의 순리에 순응하고 있다. 한때는 화려한 옷차림으로 자연을 노래하기도 하면서 홀연히 옷을 벗고 손에 쥐었던 생명의 연을 놓아 버린다. 생명의 힘을 내려놓는다.마른 나뭇잎 하나는 뻗어오르던 생명이 끊겨 떨어진 삶이 흔적이다. 파릇이 피어나기 위한 몸단장이 아니라 앙상히 존재를 버리는 종말의 의식을 보여주고 있다. 숨을 죽여 온갖 의식의 문을 닫는 최후의 순간을 나뭇잎으로 보여주고 있다.
회갑이 지난 아들과 그 아들의 아들, 그리고 어린 증손자까지 한 집에서 다복한 삶을 사시는 목욕탕집 할머니는 요즈음 자꾸 꿈길 어디쯤을 걷고 계신다. 매일 매일 넋을 잃고 목욕탕 출입구 밖 층계에 앉아 계시다가 목욕탕 안 탈의실 소파에 앉아서 긴 잠을 청하신다. 목욕탕집 밖 가로수 밑에는 앙상히 마른 낙엽이 입동의 찬바람에 소리 없이 떨어져 땅바닥에 잠들고 있다. ▩ (p. 34-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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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문학』 2021-10월(632)호 <이 시대 창작의 산실/대표작 3편> 中
* 지연희/ 1982년『한국수필』로 & 1983년『월간문학』수필 부문 & 2003년『시문학』 으로 시 부문 등단, 수필집『식탁 위 사과 한 알의 낯빛이 저리 붉다』외 16권, 시집『메신저』『그럼에도 좋은 날 나무가 웃고 있다』외, 작품론『현대시 작품론』『현대수필 작품론 』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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