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불가능을 꿈꾸는가(p.16~19/ 21~22)
엄경희
누가 진정으로 숭고함과 고귀함을 갈망하는가? "별이 빛나는 창공을 보고, 갈 수가 있고 또 가야만 하는 길의 지도를 읽을 수 있던 시대는 얼마나 행복했던가?" 이미 수없이 많은 이들에 의해 인용되었던 게오르그 루카치의 『소설의 이론』(1915)의 서문에 나오는 문장이다. 이 문구가 사람들에게 여전히 깊은 울림을 주는 까닭은 그것이 '잃어버린 시대'를 꿈꾸게 했기 때문이다. 나는 이 문구를 이제 "불가능을 꿈꾸었던 시대의 문학은 얼마나 고귀했던가?"로 바꿔 말하고 싶다. 문학 정신은 불가능한 것을 꿈꾸는 데서 발흥할 때 그 본령을 사수할 수 있다. 불가능성의 가능성을 꿈꾸는 정신적 활동은 '지금 여기'와 쟁투하며 솟구치려하는 역능을 뜻한다. 여기에는 속악하고 천박한 세계로부터 자기를 승화하려는 '비극 정신'이 내포되어 있다. 비극 정신은 인정투쟁의 노예가 되는 길을 차단한 채 이 세계가 되돌려 주는 기근을 자기에게 육화시키며 자발적 소외의 길을 걸어가는 자의 정신적 무게라 할 수 있다. 그러한 존재의 무게감이 정신의 큰 진동을 일으키는 문장으로 형상화될 때 문학은 비로소 유일한 성채星彩로 어둠을 밝히고 신생한다. (p. 16~ )
지금은 어떠한가? 우리는 과연 불가능을 꿈꾸는가? 불가능을 꿈꾸지 않는다면 그 꿈은 꿈이 아니다. 불가능을 꿈꾸는 일이 허황된 시대. 그래서 꿈 없이 급급한 시대. 가능한 것을 남보다 앞서 빠르게 계산할 줄 아는 자가 승자가 되는 시대. 어느 줄을 잡아 주류에 편입할 수 있는가를 우선적으로 고민하는 시대. 이와 같은 세태는 일상의 풍경만은 아니다. 문학도 예외가 아니라는 말이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문학이 현실에 예속되어 가고 있다고 발언하는 것이 더 정확할지도 모른다. 이는 문학적 열정에 찬물을 끼얹는 부당한 판단인가? 독자들은 모르는 세계, 즉 문학 활동 내부에서 일어나는 목불인견目不忍見의 내막을 우리는 서로가 너무나 잘 알고 있다. 한 권의 저술을 유명 출판사에서 발간하기 위해 문인들은 인정투쟁을 불사하고, 수백 개의 문학상 가운데 상당 부분을 공정성 여부와 무관하게 끼리끼리 나눠 먹고, 문예지가 곧 권력이 되고, 이런 저런 단체의 우두머리가 되기 위헤 세몰이를 하는 등등. 저잣거리를 방불케 하는 문단 내부의 이런 일들은 아주 오래전부터 있어 왔고 지금도 계속 벌어지고 있는 세속적 욕망의 일면이다. 너무나 빈번하게 일어나는 일이라 새로울 것이 없는, 다 같이 알면서 다 같이 묵인해 온 문단의 고질적 악취. 수치심과 자의식을 상실한 대가로 얻은 허상의 아우라! 나는 우리 문학 출판계에 아주 냉철하고 정교한 안목을 가진 에디터(editor)가 포진되어 있는 않은 현실이 매우 유감스럽다. 진실로 신뢰할 수 있는 에디터가 있다면 굳이 인정투쟁이 필요하겠는가. 이런 것과 무관한 채 묵묵히 자신의 창작에 헌신하는 문인들은 나의 이러한 일반화가 초래하는 무례를 용서하시라. (p. 17~ )
보다 넓은 시각에서 다시 문학의 주변을 보자. 1980년대 중반 이후부터 거대담론을 해체하면서 우리가 원했던 궁극의 목표는 자유였다. 그런데 그 자리에 지금 무엇이 들어섰는가? 우리의 기대나 희망과 달리 거대담론의 해체와 더불어 점차 양산된 것은 자유가 아니라 '사유와 상상력의 왜소증'이다. 다양한 방향에서 문학이 추구했던 낭만과 동경과 모험과 도취, 실존적 고뇌와 고귀함에 대한 헌신, 불멸하는 아름다움을 향한 도도하고도 고단한 여정, 정의와 용기의 실현, 그리고 무엇보다 자기 모순을 성찰할 수 있는 강렬한 자의식의 발흥이 우리의 문학을 지탱해왔던 동력이라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문학 정신의 지향은 세속적 욕망을 제어하고 일상을 넘어서 쇄신의 세계를 꿈꿀 때 태동된다. 누군가는 낭만, 불멸, 용기, 모험심, 자의식이 사멸해가고 있다고 말하고 누군가는 새로운 변화가 일어날 때마다 문학의 위기감 혹은 문학에 대한 불만이 야기되어 왔다고 말하기도 한다. 우리는 어느 쪽에 무게를 두고 문학의 현재성을 진단해야 하는가? (p. 18~ )
이 대목에서 그간 거듭되어 왔던 매체의 변화를 생략하기 어려울 듯하다. PC와 스마트폰의 보급은 사람들의 일상생활과 관심을 획기적으로 바꾸어 놓은 계기점이라 할 수 있다. 볼거리가 무궁무진한 가상의 세계와 지식 정보를 우리는 너무도 쉽게 검색할 수 있게 되었다. 21세기 대한민국의 보편적 일상의 상당부분은 '검색'에 할애된다. 이와 같은 변화의 추세를 무반성적으로 따라 가면서 우리가 잃어버린 것은 '심연'이다. 생활에 필요한 거의 모든 것을 즉각적으로 알려주는 '검색'의 편리함은 우리를 길들이며 충족시킨다. 그 이상 무엇이 필요하단 말인가? 진지하게 고민하고 탐구하지 않아도 다 해결 가능한 듯 보이는 그 세계는 이미 보편적 판타지이며 때로 정신의 길잡이인 것처럼 작용한다. (p. 19~ )
문제는 '즉각성'이다. 그 과정을 거칠게 말하면 소설은 점차 단문의 형태로, 시는 은유를 이미지로 대체하는 현상을 드러내고 있다. 몇 마디 문자로 빠르게 대화를 주고받는 일상의 위력이 문체를 바꾸어 놓았다고 할 수 있다. 복문을 쓸 수 있는 능력의 쇠퇴와 이질적인 두 개의 차원을 동시에 직관해낼 수 있는 은유 구사력의 감소는 2000년대 이후 문학이 보여준 쇠락의 징후이다. 문학은 처음부터 끝까지 말과 글을 질료로 미적 세계를 구축하는 활동이라 할 수 있다. 문체는 사상과 관념과 감수성이 한 덩어리로 뭉쳐져 철학적 추상을 뛰어넘는 위대한 실체인 것이다. 상상과 사유의 '심연'을 파고들기 전에 빠르게 지나가는 문장들, 성의 없이 던져진 무미건조한 시구들, 공들이지 않은 추의 미학, 자질구레한 신변잡사의 감정적 토로가 범람하는 현실에서 나는 새로운 변화의 가치가 무엇인가를 되묻게 된다. 지금의 미시적 세계는 숭고의 위용과 결별해 가고 있다는 게 나의 판단이다. 그것은 위대한 정신에 대한 열망이 소멸하는 것을 의미한다. 크고 위대한 정신의 영토에 쟁기질을 멈출 때 문학의 소임과 신념은 무엇으로 대체되는가? (p. 19)
(···)
이러한 문학 내부의 사태 속에서 불멸의 사랑을 꿈꾸거나 신성함과 신비함을 갈망하거나 자신으로 되돌아가는 실존적 귀향의 고단한 여로를 방랑하는 정신의 활동은 낡은 노스탤지어가 되었다. 이 비천한 세계에서 불가능을 꿈꾸는 자는 누구인가? 21세기 문학의 소임과 신념은 무엇인가? 앞서 말했듯이 새로운 변화가 일어날 때마다 문학의 위기감 혹은 문학에 대한 불만이 야기된 것은 사실이다. 장황하게 늘어놓은 나의 회의감이 시대착오적인 판단에 불과한 것으로 철저하게 무시되길 진정으로 소망한다. 누군가 나의 우려를 가차 없이 밀치고 불가능을 꿈꾸며 저 광포한 '왜소증'의 물살을 뛰어넘어 인간이 고귀한 존재라는 사실을 문학으로 증명해 주길 간절히 바라는 것이다. (p. 21~2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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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술가』 2021-가을(46)호 <특집 - 문학이란 무엇인가>에서
* 엄경희/ 2000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평론 부문 당선으로 등단, 저서『빙벽의 언어』『未堂과 木月의 시적 상상력』『2000뇬대 시학의 천칭』등, 현) 숭실대 국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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