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두언>
빙하기 극복의 길
조정래/ 소설가
마침내 문학계에 빙하기가 닥쳐왔다. 10여 년 전부터 떠돌기 시작했던 '문학의 위기'라는 음울한 소문이 기어코 현실이 된 것이다. 그 소문은 태풍의 전조처럼 불길하고 불안했지만 막을 도리도, 피할 방법도 없었다. 그저 닥쳐오면 당할 수밖에 없는 운명적 불행이었다.
그런데 태풍의 위력으로 문학계를 강타해온 그 불행의 존재는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맹랑하고도 해괴한, 손바닥만 한 기계 스마트폰이었다.
핸드폰이 처음 나왔을 때 일반인들 중에는 머지않아 스마트폰이라는 이상야릇한 물건이 돌출하리라는 것을 상상한 사람은 거의 없었을 것이다. 사람들이 '들고 다니는 전화기'의 신통한 편리함에 매료되고 있을 때 극소수의 파격적인 과학자들은 스마트폰이라는 기상천외한 기계를 탄생시키려고 진통하고 있었던 것이다.
스마트폰은 비행기의 발명을 능가할 만큼 사람들을 경탄시키며 21세기 주인공으로 화려하게 등장했다. 그런데 스마트폰의 경이로움은 갈수록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그 다양한 기능의 진화와 변신은 정신을 차릴 수 없을 지경으로 빠르고 현란하게 거듭되고 있었던 것이다. 몇 개월 간격으로 새 기능을 갖춘 스마트폰이 출시될 때마다 세계 각국에서 사람들은 환호성을 울렸다. 사람들은 비싼 값을 아랑곳하지 않고 새로운 요술을 부리는 스마트폰을 사려고 앞다투어 상점으로 달려가 밤샘 줄을 서고는 했다. 이런 철부지 같은 짓들을 보면서 스마트폰을 만들어낸 회사들은 억만장자가 되어가는 포만감을 맘껏 즐겼을 것이다.
그동안에 수십 번의 기능 진화를 꾀한 스마트폰은 현대인의 일상생활의 편리를 주도하는 생필품의 위치를 넘어서서 현대인의 영혼까지 지배하는 신의 위치로 군림하게 되었다. 사람들은 잠이 깨어 잠이 들 때까지 스마트폰을 손에서 놓지 못한다. 그리고 남녀노소 없이 스마트폰에 풍덩 빠져 눈을 떼지 못하는 모습을 어디서나 볼 수 있다.
그동안에 수십 번의 기능 진화를 꾀한 스마트폰은 현대인의 일상생활의 편리를 주도하는 생필품의 위치를 넘어서서 현대인의 영혼까지 지배하는 신의 위치로 군림하게 되었다. 그리고 남녀노소 없이 스마트폰에 퐁당 빠져 눈을 떼지 못하는 모습을 어디서나 볼 수 있다.
모든 사람들의 그 스마트폰 중독은 치료 불가능한 중증 질환 상태다. 열 살 조금 너어 보이는 아이가 식당에서 엄마와 마주앉아 "엄마, 엄마···" 하며 말을 거는데도 엄마는 스마트폰에 넋이 빠져 아무 대꾸도 하지 않자 아이는 단념한 얼굴로 제 스마트폰을 꺼내들었다. 어디 이런 광경만이랴. 애인끼리 마주앉아서도 대화를 전혀 나누지 않고 제각기 스마트폰에 온통 정신이 팔려 있는 것도 흔히 볼 수 있다. 그리고 할아버지 아들 손자가 둘러앉은 식당에서도 서로 말 한마디 없이 자기 스마트폰에 흠뻑 빠져 있기도 한다. 요술방망이를 압도하는 스마트폰의 온갖 다채롭고 현란한 기능들은 이렇듯 친밀한 사람들끼리의 대화마저 단절시키고 차단시키는 독을 내뿜기 시작한 지 오래되었다. 이렇듯 스마트폰에 깊이 중독되어 있는 사람들이 스마트폰을 끄고 책을 펼쳐 들 리가 없다.
스마트폰의 광풍이 불기 전에 컴퓨터와 인터넷이 일반화되었을 때 선진국에서부터 제기된 화두가 '종이책의 운명은 어찌 될 것인가'였다. 그 궁색스럽고 나약한 진단이 '그래도 종이책은 존재할 것이다'였다. 그런데 스마트폰의 막강한 위력 앞에서 그 가냘픈 희망은 여지없이 깨져나갈 운명에 처하고 말았다.
그 실증이 우리 앞에 대두했다. 3~4년 전부터 '단군 이래 최대의 불황'이라는 말이 모든 문인들을 위축시키지기 시작한 것이다. 마침내 '책 안 읽는 시대'가 현실이 되고 말았다. 그 현실을 실감나게 보여주는 것이 일본이다. 스마트폰이 나오기 전에 일본 사람들은 세계에서 책을 제일 많이 읽는 국민으로 뽑혔다. 그 사실을 실증하듯이 지하철을 탄 사람들이 거의 다 책을 읽고 있는 모습을 우리나라 텔레비전에서는 가을이면 보여주고는 했다. 일본을 선전해 주자는 것이 아니라 우리도 책을 좀 읽자는 뜻이었다. 그런데 얼마 전에 비춰진 영상은 일본 사람들도 우리나라 사람들과 똑같이 스마트폰에 넋이 빠져 있었다. 스마트폰의 다채롭고 현란한 기능들은 가만큼 유혹적이고, 자극적이고, 마력적이고 그리고 마침내는 중독자를 만들어 버리는 것이다. 그리하여 현대인들은 21세기 최고 문명의 이기로 불리는 스마트폰의 노예가 되고 말았다.
그런데 그 요망한 스마트폰의 기능이 앞으로도 무한정 발전, 진화하리라고 한다. 우리 문학계의 동토화는 갈수록 심해지리라는 불길한 예고다.
그럼 이렇게 피할 수 없는 위기 앞에서 우리 문학인들은 어찌 해야 할까. 속수무책, 필을 놓으며 백기를 들어야 할까. 그럴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이런 막다른 상황에서 벗어나려고 일찍이 우리 선조들은 보석 같은 말씀을 남겨주셨다.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은 있다'는, 익히 아는 가르침을 곱씹으며 소생의 길을 찾아야 한다.
짧지 않은 근대 문학사를 돌이켜 보면, 시대 변화에 따라 문학의 길을 가로막는 훼방꾼들은 지속적으로 이어졌었다. 문학 독점시대를 헤집고 든 첫 번째 문명의 이기가 라디오였다. 두 번째가 영화, 세 번째가 텔레비전, 네 번째가 총천연색 영화, 다섯 번째가 컬러텔레비전, 그 문명의 이기들이 탄생할 때마다 문학은 독자와의 교류를 위협당해 왔다.
그리고 또 우리나라 작가들은 딴 나라 작가들이 겪지 않은 두 가지 고난의 늪에 빠져야 했다. 일제 식민지 시대와 6 · 25 전후시대를 겪어내야 했던 것이다. 80% 넘게 문맹인 상황에 일제는 한글마저 쓰지 못하게 탄압했다. 그 생지옥 속에서도 우리 선배 문인들은 굶주리며, 병들며 글을 써냈다. 그리고 전 국토가 초토화되어 버리고, 모두가 거지꼴로 허덕거리던 그 참혹한 전후 상황 속에서도 우리 문인들은 또 글을 써냈다. '단 한 명의 독자가 있어도 글을 쓰겠다'는 혈서 같은 다짐을 가슴에 품고서.
문학정신은 그런 것이다. 그 어떤 문명의 이기도 그 예리하고 굳센 문학정신을 둔중하게 하거나 파괴할 수 없다. 어느 시대에나 그랬듯 건강한 문학을 지키는 유일한 길은 문학인의 강건한 정신력뿐이다. 열 배 스무 배 더 치열한 노력을 바쳐 좋은 작품을 써내는 길밖에 없다. 그러면 독자들은 자연스레 책을 펼쳐들게 된다. 그 확신은 지난 역사가 잘 보여주고 있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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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월간문학』 2021-8월(630)호 <권두언> 에서
* 조정래/1943년 전남 순천 출생, 등단, 1970년『현대문학』으로 소설 부문 등단, 대하소설『태백산맥』『아리랑』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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