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두언>
우리 시대의 노래를 위하여
구석본
가시리 가시리잇고/ 버리고 가시리잇고/ 날러는 엇지 살라하고/ 버리고 가시리잇고/ 잡사와 두어리마난 선하면 아니올세라/ 설운님 보내옵나니/ 가시는 듯 도셔 오소서
고려 속요 <가시리>를 ‘나ᄂᆞᆫ’이라는 투식어套式語와 각 연의 '위 증즐가 태평성대太平盛大'라는 후렴구를 생략하고 인용했다. 현대에 와서 대중가요로 작곡되어 널리 불리어지기도 한 '가시리'다. 수백 년 시간을 초월하여 재창조되어 불릴 수 있는 그 생명력이 놀랍다.
속요俗謠란 글자 그대로 속된 노래다. 이런 명칭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향유 계층이 평민이고 평민들에 의해 창작된 문학이다. 짐작건대 당대 지식인들에게는 외면당했을 수 있는 노래인 것이다. 지은이도 전하지 않는다. 평민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내려오다가 문자로 정착된 것이다. 민초들의 애틋한 정한이 담긴 노래다. 탁월한 문학적 수식이나 표현 기법은 크게 눈에 띄지 않지만 운율이 아름답고 유려하다. 감정을 진솔하고 담백하게 드러낸 당대 평민 문학의 백미라 하겠다. 평민 문학이란 요즘으로 말하면 전문 지식이 없는 평범한 생활인즉 아마추어에 의해 창작되어 부른 노래라 할 것이다.
고려가요 중, 속요와 대칭적 위치의 시가詩歌는 경기체가景幾體歌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당대 사대부 문인들이 이름을 걸고 지어 부른 귀족 문학이다. 요즘에 굳이 대입하자면 전문적인 시인의 작품이다. 그런데 '가시리'는 오늘까지 인구人口에 회자膾炙되는데 비해 상대적으로 경기체가는 국문학적 연구 대상이 되지만 일반인과는 먼 거리에 있다.
옛 그림에도 생활인 즉 아마추어 화가에 의해 그려진 민화民畵가 있다. 민화의 작가는 본인이 화가라는 의식이 없었다. 생활에 필요한 가재도구를 좀 더 아름답게 혹은 생활 환경을 더 운치있게 꾸미려는 소박한 욕구의 산물이라 하겠다. 다시 말해 생활에서 오는 필요성 때문에 생산된 작품이다. 오늘날에 와서 민화는 나름대로 예술적 가치를 인정받고 전문 화가들의 작품 못지 않게 사랑을 받고 있다.
속요와 민화가 지금까지 생명력을 가질 수 있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그 동력은 복합적일 수 있겠지만 가장 본질적인 것은 창작될 당대서부터 그 정체성을 지켜왔기 때문이다. 즉 속요로서의 정체성', 평민문학으로서 자리를 굳건하게 한 것이다. 귀족문학인 경기체가를 융내내거나 그 경향을 따르려 하지 않았다. 요즘으로 치면 아마추어리즘을 확실하게 지킨 것이다. 나름의 순수한 가치를 지켜낸 정신이 오늘까지 이어질 수 있는 생명력의 바탕이 되었을 것이다. 민화 역시 그렇다.
많은 사람들이 오늘날의 시단을 혼란스럽다 한다. 많은 시인과 많은 문예지와 그 문예지를 통해 대량으로 발표되는 시, 이런 요소들이 복합적으로 만들어내는 혼란일 것이다. 여기서 많은 시들이 생산되고 발표되는 것이 부정적이거나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다. 그 작품 수준에 있어 차이가 있음에도 걸러지지 않은 채 쏟아지기에 독자들은 혼란스러워 하는 것이다. 전문적인 시인에 의해 창작된 시와 일반인들이 쓴 취미 수준의 시가 엉켜 있기 때문이다. 굳이 말하자면 프로페셔널리즘적인 시와 아마추어리즘적인 시가 엉켜 일으키는 혼란일 것이다.
1960년대만 해도 독자들은 시인들의 시를 감상하는 데 만족했다. 그러나 1970년~80년대 이른바 '참여시'와 '민중시'를 거치면서 시인들의 시를 감상하는 데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일반인들도 직접 시를 쓰기에 이른다. 작품성에 논란이 일게 마련이다.
시 쓰기를 흔히 시 창작이라 한다. 즉 창조적인 요소가 있어야 한다. 그렇다면 새로은 세계, 즉 기존의 가치나 정신이 아닌 새로운 가치, 새로운 정신, 사물과 사실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담고 있는 시를 작품성이 있는 시라고 하겠다. 이러한 새로운 세계를 드러내는 시를 쓰는 일군의 시인들을 전문적인 시인이라 한다면 일상의 생각과 느낌을 시의 형식으로 소박한 언어로 진술하는 것을 아마추어적인 시라 하겠다. 일반인들은 후자의 수준에서 시를 쓴다. 시를 쓰면 발표 욕구가 일기 마련이다. 여기에 편승해 이런 시인들에게 등단을 미끼로 문예지를 판매하는, 이른바 '등단 장사'를 하는 문예지들이 공공연하게 발간되고 있다. 결국 시단이 혼란스러워질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
이제 일반인들의 취미적인 시작 활동에도 전문적인 시인들이 관심을 가질 때가 되었다고 본다. 그들의 시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는 것은 문학적인 측면뿐 아니라 사회적으로도 긍정적이고 바람직스러운 일이다. 시를 향유하는 계층이 그만큼 두터워진다는 것은 우리 사회의 문화생활의 척도가 그만큼 높아지는 것이 아니겠는가. 다만 일반인들의 취미적인 시작 활동을 건전한 방향으로 이끌고 육성하는 것이 과제다.
여기서 평민 문학인 고려 속요 <가시리>가 오늘날까지 이어져 불리는 그 생명력을 되돌아보게 되는 것이다. 당시 평민 문학의 주체들은 노래 그 자체를 즐겼을 뿐 사대부와 함께 전문적인 문인임을 자처하지 안았다. 그러므로 오히려 그들만의 정신과 그들만의 노래를 지킬 수가 있었고 결과적으로 평민 문학의 정체성을 오롯이 지켜 수백 년까지 이어질 수 있었다.
여기서 오늘의 일반인들 시작 활동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암시받을 수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상업성에 찌든 문예지들의 '등단 장사'에 현혹되지 않아야 할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시를 즐기는 사람으로서 가져야 할 자존심이며 정신이다. 그리고 전문적인 시인들은 이런 일반인들의 작품을 시 창작의 근간인 창조적인 면이 없는 단순 반복적이고 감상적이라고 마냥 외면할 것이 아니다. 그들의 진솔하고 고백적이고 일상적인 시, 역시 시대정신의 한 단면임을 인정할 때 우리 시단은 더욱 풍성해질 것이다.
선결되어야 할 것은 그들의 작품을 담을 그릇, 즉 문예지들이 발간되어야 할 것이다. 정신의 가치보다는 상업적 이익을 추구하는 '등단 장사'하는 문예지가 아닌 그들 작품의 발표의 장이 되어 그들의 시정신을 기록하는 시대적 사명감을 가진 문예지가 출현해야 할 것이다.
이런 환경이 마련될 때 먼 훗날에도 기억되고 재생될 <가시리>와 같은 우리 시대의 노래를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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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파 MUNPA』 2021-여름(60)호 <권두언> 에서
* 구석본/1975년 월간『시문학』으로 등단, 시집『지상의 그리운 섬』『추억론』『고독과 오독에 대한 에필로그』, 1985년 대한민국문학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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