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 파트의 글

안수환『주역시학』/ 부분들(p-202, 133, 81, 28, 210~211)

검지 정숙자 2020. 11. 6. 02:29

 

 

    내 마음속 물결이 잔잔히 출렁거리도록

 

    안수환

 

 

  냇물은 호수와는 다르게 물이 겹치고 겹치면서 흘러간다. 그침이 없이 흐르는 이 물결을 습감習坎이라고 한다. 군자는 이 모양을 보면서 부단히 덕행을 쌓아가면서 남을 가르치는 일에 매진한다(수천지 습감 군자 이 상덕행 습교사 水洊至 習坎 君子 以 常德行 習敎事 「괘상 卦象」). 냇물은 흐르고 또 흘러가니 살아 있는 물이다. 눈을 뜬 물이다. 한순간도 멈추지 않고 흐르고 또 흘러가는 물결을 보라. 먼 곳 우주의 변형들까지 여기 물가로 내려와 그 시냇물의 속삭임을 듣고 있지 않는가. 군자가 보여주는 상덕행常德行의 행실은 그 뜬 눈의 물결과도 같은 것이었다. 남을 가르치는 군자의 입술에도 그 시냇물의 맑은 숨소리가 묻어있지 않겠는가. 군자는 누구인가. 그는 냇물을 바라보면서 반대편에 잠들어 있는 물을 흔들어 깨워놓는 자다.

   -중수감重水坎, 부분(p-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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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물 한 모금이 국가의 순정률純正律이다

 

 

  어느 한순간, 물은 바람과 결합한다. 바람이면서 나무인 공기의 진폭이 물과 한 몸으로 섞이면서 영혼의 유동체流動體가 나타난다. 말하자면, 물은 더 이상 물체(objets)가 아닌 정신의 기표가 되어 우리네 삶을 좀 더 깊은 혼불로 불태운다. 나는 물속에서 물결의 뜻에 따라 움직이는 훈심薰心을 얻는다. 그렇다면, 나는 누구인가. 나무 곁에서 나는 지나가는 나무일 뿐이다. 나는 어느덧 내 자신이 과객의 신분이면서도 과분하게도 먼 우주의 품으로 비상飛上하는 바람의 적손嫡孫이 되었다. 인간은 바람의 계략計略 앞에서 누가 자유로울 수 있겠는가.

     -수풍정水風, 부분(p-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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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간의 마음은 천도의 생장生長을 본받는다

 

 

  어느 날, 어떤 친구가 미생고微生高의 집에 찾아와 식초를 꾸어달라고 했다. 미생고의 집에도 식초가 없었다. "기다리게" 미생고는 이웃집으로 달려가 식초를 얻어 친구의 손에 들려주었다. 이 일화를 듣게 된 공자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미생고 그 사람. 누가 정직하다고  하겠는가. 그는 이웃에게까지 가서 그 식초를 빌어다가 주었으니"(숙위미생고직 혹 걸혜언 걸저기린이여지孰謂微生高直 或 乞醯焉 乞諸其隣而與之 『논어』 「공야장公冶長」). 공자는, 미생고의 그 선심이 위선적일 수 있음을 그렇게 일깨웠던 것이다. 미생고는 결손 缺損앞에서 정직하지 못했다. 그것도 그럴 것이 삶 그 자체는 이미 정직한 실행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수택절水澤節, 부분(p-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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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덜어내라, 하늘을 지워내는 새들처럼

 

 

  우리는 늙어간다. 우리는 그렇게 하루하루 내 자신을 덜어내고 있는 것이었다. 나는 날마다 내 아내를 본다. 아내는 한 번도 자기 자신의 안일을 위해 어떤 불만도 내보인 적이 없다. 언제든지 차분했고 언제든지 솔직했다. 달과 별들의 속삭임을 간직한 아내의 눈빛은 늘 청량했다. 그러면서도 아내의 눈가에는 먼 먼 심연과도 같은 참을성이 잔잔히 감돌고 있었다. 저 사람은 혹시 천왕성에서 건너온 종달새가 아닐까. 나중에 붙잡은 생각이지만, 그러니까 우리 집 행복의 본연은 산 넘어 건너온 숨결이 아니었다. 행복은 머리카락을 단정히 매만지는 아내의 빗질에 붙어 있었다. 단순하게 말하자면, 그런데 우리 동네 아낙들 대부분은 내 아내와도 같은 기품을 지닌 사람들이었다.

    -산택손山澤損, 부분(p-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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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은 내 자신을 바라볼 때다

 

 

  인생 경험을 통틀어보면, 여러 갈래 난관들이 내 앞길을 가로막고 나선다. 거의 조용할 날이 없었던 것이다. 올라가는 길. 내려가는 길. 그리고 돌아가는 길. 그때마다 쾌 · 불쾌의 감정이 휩싸이곤 한다. 자연이든 초자연이든 불운은 대개 외부로부터 올려온다. 이는, 마음의 부주의를 떨쳐내기가 그만큼 힘들다는 뜻이다. 그러나 그렇더라도 이때는 내 삶의 합목적성[즉, 쾌적한 시간]을 서둘러 찾지 않으면 안 된다. 어디서 내 자신의 참된 위직爲直을 찾아낸단 말인가. 참됨이란 그것이 순전한 평온일진대 아직도 나는 어쩔 수 없는 감정의 편협함에 매몰되어 있지 않은가. 내가 경험하는 광명光明[혹은, 현존] 내 자신 개별을 향한 긴장에 갇히지 않고, 언제든지 '당신네'[즉, 시대와 역사]의 합종合從[즉, 이 땅 위에서 함께 손뼉을 치며 살아가는 박동 搏動] 그 방향으로 귀속된다. 그것이, 말하자면 칸트(I. Kant 1724-1804, 80세)가 말했던 보편적 타당성이었다. 가령 아름다움은, 꽃이 품고 있는 아름다움에 대한 감상鑑賞이 아니다. 아름다움은 '당신네'와 함께 손뼉을 치는 박동 한복판에서 아무 때나 흔들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광명[즉,]에게 한 번 더 물어보자.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우리는 아름다움 앞에서 그 아름다움을 음미하면서 여기 머물러 있다.(『판단력 비판』).

      -화수미제山火水未濟, 부분(p. 210-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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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수환 지음 『주역시학』 에서/ 2020. 8. 28. <도화> 펴냄

 * 안수환/ 충남 세종시 출생, 1973년 『시문학』으로 & 1976년 『문학과지성』으로 등단, 시집 『神들의 옷』 『 저 들꽃들이 피어있는』 『地上詩篇』 등, 시론집 『시와 실재』 『우리시 천천히 읽기』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