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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고_『한국을 사랑한 세계작가들 3』/ 프란체스카 도너 리

검지 정숙자 2020. 8. 30. 13:41

 

     이승만 대통령의 오스트리아인 영부인

 

        프란체스카 도너 리

     Francesca Donner Rhee, 1900~1992, 92세

 

        최종고(崔鐘庫)

 

                                 

 

 

      『대통령의 건강』(1988)

      『프란체스카의 난중일기』(2010)

 

                                

     

 

  나는 프란체스카 도너 리(Francesca Donner Rhee, 1900-1992, 92세) 여사를 한 번 뵈었다. 1989년인가 이화장에 세배드리러 갔는데, 잠시 한국어와 영어와 독일어를 섞어가며 대화를 나누었다. 연로하신데도 소녀같은 웃음을 지으셨다. 『이승만대통령휘호집』에 사인을 해서 선물로 주셨다. 그 후 다시 이화장에서 한국인물전기학회의 주최로 며느님 조혜자 여사가 <시어머니 프란체스카 여사>에 대한 발표회를 가졌다. 그 자리에서 프란체스카 여사의 유품 등을 관람하고 다시 깊은 감동을 받았다. 대통령의 영부인이라고는 상상할 수도 없을 정도로 수수하다 못해 초라한 의복과 가구를 보고 존경심이 일었던 기억을 지금도 지울 수 없다.

  여기서는 작가이자 기록자로서의 프란체스카 여사를 다룰 것이다. 사실 나는 여사가 그렇게 꼼꼼하고 충실한 기록자라는 사실은 두 권의 저서를 읽기 전에는 알지 못했다. 독립운동 시기부터 이승만 박사의 곁에서 비서 노릇을 충실히 했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저서들을 통해 자신의 관찰과 증언을 기록한 '작가'임을 확인하게 되었다. 물론 이런 기록들을 책으로 내는 과정에서 이인수 박사 내외를 비롯한 연구자들의 도움을 받았을 것이다. 아무튼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의 영부인 프란체스카 여사가 남편의 모습을 바로  옆에서 지켜보면서 자신의 증언을 숨김없이 자세히 기록해 출간했으니 여간 뜻깊고 다행스런 일이 아니다.

 

 

   작가의 생애 

                   

  

  프란체스카 도너 리(Francesca Donner Rhee)는 1900년 6월 15일 오스트리아 빈(Wien)에서 가톨릭 가문의 사업가 루돌프 도너의 세 딸 중 막내로 태어났다. 아들이 없었던 아버지는 영리한 막내딸이 가업을 잇기를 원했고, 아버지의 뜻에 따라 영국으로 유학을 떠나 유창한 영어실력을 갖추게 되었다. 1920년 독일의 자동차경주 선수 헬무트 뵈룅(Helmut Boehring)과 결혼하였으나 3년 만에 이혼하였다.

  1934년 제네바에서 국제연맹 회의에 참석한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표 이승만 박사를 만났고, 어머니의 반대를 무릅쓰고 같은 해 10월 8일 미국 뉴욕 클레어몬트 호텔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프란체스카는 미모와 세련된 매너, 뛰어난 외국어 실력 등을 갖추었는데, 그런 그녀는 미국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이승만에게 꼭 필요한 존재였다. 이승만이 태평양전쟁을 예측한 책인 Japan Inside-Out(일본 내막기)』도 프란체스카 여사의 손끝에서 나온 책이다.

  프란체스카는 한때 '호주댁濠洲宅으로도 불렸는데, 그때는 오스트리아를 오스트레일리아와 구별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또한 미국 출신이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녀는 이부란富蘭이라는 한국이름도 있는데, 이는 이승만이 지어준 것이다.

  1945년 10월 이승만과  함께 귀국하였다. 이후 돈암장과 이화장에서 거주하다가 1948년 8월에 이승만이 대통령에 선출되자 경무대로 이주하여 살았다. 1948년 1월 12일 UN한국위원단이 서울에 도착하자 이승만을 따라 회의에 참관하기도 하였다.

  1955년 11월 중앙대학교 대학원에서 명예법학박사 학위를 수여했다. 쇠약해진 대통령을 대신해 여러 정책 문제를 처리하기도 했다. 얼마 뒤 4 · 19혁명으로 이승만 대통령이 자진 사임한 후 하와이로 출국하자 함꼐 하와이로 떠났다. 거주지를 정하지 못해 수시로 거처를 옮겨 다니던 부처는 화와이 한국인 교포단체의 도움으로 한 빌라에 머무르다가 이승만의 병세가 악화되어 요양원으로 옮겨졌다.

  1965년 7월 19일 이승만이 별세하고 하와이에 머무르다 오스트리아로 갔다. 이후 친정 동생, 친정 언니의 집을 전전하였다.

  1970년 5월 16일에는 대한민국 정부의 배려로 귀국하였다. 이후 청와대가 주관하는 각종 행사에 귀빈으로 초대되었다. 이후 양자 이인수 교수 내외와 함께 이화장에서 살았다. 만년에는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된 이승만의 묘소를 찾아 참배하는 것을 낙으로 삼았다.

  1992년 3월 19일 이화장에서 92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3월 23일 서울 정동제일교회에서 영결식을 마친 뒤 동작동 국립현충원에 묻힌 남편 곁에 안장되었다. 오스트리아 빈(Wien)에는 2012년에 조성한 'Francesca Donner Rhee Weg(프란체스카 도너 리 길)'이 있다.

 

 

   작품 속으로

                    

 

  『프란체스카의 난중일기』는 2010년에 양장본과 보급판으로 출간되었다. 책에는 머리말을 대신하여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연구원 남정옥 박사의 글이 붙어 있다. 이에 따르면, 이 책의 원본은 프란체스카 여사가 쓴 영문일기이다. 이 영문일기는 '비망록(Confidential Notes)' 혹은 '프란체스카 일기(Mrs Rhee Diary)'로 통용되었다. 전시에 대통령과 경무대를 중심으로 일어난 전쟁 상황을 포함한 국내외 중요한 사건들을 기록한 '대통령의 경무대일지'라고 불렸다. 그런 점에서 대통령의 '전시통치사료'의 성격을 지닌 책이다.

  이 책은 전쟁이 발발한 1950년 6월 25일부터 중공군 개입 후 유엔군이 37도선으로 철수하여 재반격을 시작하는 1951년 2월 15일까지의 상황을 기록하고 있다. 이 책의 내용은 1983년 6월 2일자 ⟪중앙일보⟫에 「6 · 25와 이승만 대통령」이라는 제목으로 113회에 걸쳐 한글로 처음 공개되었다. 이때 영문일기에 누락된 기간의 내용을 기억과 자료에 의해 복원하였다. 이 비망록은 이 대통령의 지시로 작성되었는데, 그 이유는 당시 경무대 비서로 김광섭(1905년~1977, 72세)이 <경무대 일기>를 적었으나 너무 문인답게 시적으로 적어 부인에게 사실대로 적으라고 부탁했다는 것이다. 

  몇 군데 손에 잡히는 대로 인용해 본다. 한국전쟁을 어떻게 맞았는지를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북한 공산군은 6월 25일 새벽 5시에 쳐들어왔다. 나는 이날 오전 9시에 어금니 치료를 받으러 치과로 갔고, 대통령은 아침식사를 끝내자 9시 30분쯤 경회루로 낚시하러 나갔다. 10시쯤 신성모 국방부장관(국무총리서리겸임)이 허겁지겁 경무대로 들어와 "각하께 보고드릴 긴급사항이 있습니다"라고 했다. 두 분이 집무실에서 마주앉은 게 오전 10시 30분, 이 자리에서 신 장관은 개성이 오전 9시에, 그러니까 내가 치과로 떠나던 그 시각에 이미 함락되었고 탱크를 앞세운 공산군은 춘천 근교에 도착했다고 보고했다. 대통령은 "탱크를 막을 길이 없을 텐데···"라며 입속말을 했고, 순간 얼굴엔 어떤 위험을 느끼는 듯한 불안의 빛이 스치고 있었다. 시내에는 '우리 아이들'   대통령과 나는 군인들을 꼭 우리 아이들(Our boys)이라고 불렀다   을 태운 트럭이 북쪽을 향해 달리고 있었고, 시민들은 영문도 모른 채 '이제 38선이 깨진 모양이니 이북땅도 되찾겠지"라며 이들에게 격려의 박수를 보냈다. 경무대 안 분위기도 사태의 심각성을 모르는 것 같았다. "그 자식들 장난치다 그만두겠지"라는 식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신 국방까지도 대통령에게 "크게 걱정하실 것 없습니다"라는 말을 되풀이했다. 그러나 경찰경보는 '상황이 심각하고 위급'하다는 것이었다. (23쪽)

 

  8월 12일의 일기에는 이런 기록이 있다. 

 

  미군기들은 하루 종일 출격했으나 적의 움직임은 조금도 사라지지 않았다. 정말로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어젯밤엔 인도의 유엔한국위원단(UNCOK) 군사 옵서버가 영국기자 2명, 한국인 4명 등과 함께 전선으로 갔다가 지뢰를 밟는 바람에 이들 전원이 사망했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국방장관은 사전에 이들에게 안내자가 없는 전선방문을 금한다고 통고해 주었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도 모르게 떠났다가 참변을 당했다고 보고했다. (94쪽)

 

  이들 영국 기자 두 사람 중 하나는 이안 모리슨(Ian Morrison)이었는데, 바로 소설과 영화 <모정Love is a Marry - splendored Thing> (1958)의 남자 주인공, 즉 작가 한수인과 홍콩에서 열애를 나누다 종군기자로 급파되어 온 그였다(자세한 내용은 『한국을 사랑한 세계작가들』 2권, 228~237쪽 참조), 다음 날인 8월 13일의 일기는 낙동강 전선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다.

 

  국방장관이 아침에 와서 매일 같이 전사자 명단을 놓고 검토하다 보면, 미24사단에서 실종자가 대거 발생하고 있다. 실은 그들 대부분이 도망병이라고 했다. 미 전투부대의 실종자들은 거의가 일본에 주둔하고 있을 때 취사병이었거나 부대 내의 지원부서 사병들이었다. 그래서 전투능력이 없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워커장군은 이 사실을 알고 나서 그곳에 새로운 병력을 파견했다. 어제 왜관에 다녀온 외무장관이 강둑 위에는 파괴된 대포와 부서진 탱크들만이 나뒹굴고 있다고 전했다. 그는 미군들이 공중엄호를 받고 장거리포도 갖고 있으면서, 왜 진격을 하지 않느냐고 반문했다. 우리는 어느 지점응ㄹ 돌파할 것인가의 여부를 따질 시간이 있다면 차라리 그 시간에 공격을 퍼부을 텐데, 미국인들은 항상 "좀 더 기다려보자"는 소리만 되풀이하고 있다. (95쪽)

 

  이처럼 생생한 기록이기 때문에 여기서 인용하고 싶은 것들이 많다. 그렇지만 지면 관계로 많이 인용하지 못하니 책을 직접 읽어보시기를 권한다. 저자는 영부인이었기에 공적으로 중요한 사항들을 일기에 남겼지만 여성으로서 흥미를 느낀 것들도 남겼다.

 

  나는 무척 신경 쓰였다. 어느 집 여자치고 이런 기분은 마찬가지일 것이다. 어느 날 밤 11시가 다 되어 주방에 떠드는 소리가 나서 가만히 다가가 보니 양씨가 술에 취해 '자선파티'를 열고 있었다. "소금 조끔", "간장 조끔" 하면서 웃는 소리가 났다. 가정부가 걱정스레 말했다. "대통령 사모님한테 들키면 어떻게 하려고 이러세요?" 그러자 양씨가 "내 빽이 대통령인데 '깍쟁이 사모님'이 어쩌겠어?" 하며 큰소리를 쳤다. 나는 '깍쟁이'란 말을 몇 번 들었지만 정확히 무엇을 뜻하는지 그때까지 몰랐다. 나는 대통령에게 가서 "양씨가 나더러 깍쟁이라는데 그게 뭡니까?"라고 물어보았다. 대통령이 "알뜰하게 살림 잘하는 부인네를 칭찬하는 말이요"라고 가르쳐 주었다. 그러나 얼마 후에 그 말이 꼭 좋은 뜻만은 아니라는 걸 알았다. (110쪽)

 

  놀랍게도 1950년 10월 6일의 일기에는 모윤숙에 관한 기록도 나온다.

 

  모윤숙 씨가 단정하고 말쑥한 차림을 하고 생기가 도는 모습으로 우리 임시관저를 찾아왔다. 전쟁 중 잃어버린 외딸 경선이를 찾았다고 대통령께 감사드리러 온 것이다. 지난번 서울 경무대에서 지저분한 차림으로 대통령을 찾아뵙고, 자기를 버려두고 후퇴했다고 원망하며 딸을 찾아내라고 떼썼던 일을 사과하러 왔다고 했다. 우리는 딸을 찾았다는 말을 듣고 퍽 반갑고 기뻤다. 지난번 서울 환도식이 끝난 다음 경무대로 찾아온 모윤숙 씨가 대통령에게 원망 섞인 말을 했을 때 대통령은 "그래, 내가 죄가 많아. 딸은 꼭 찾아줄게. 윤숙이의 건강부터 우선 회복해야 하겠어"하고 위로했다. (179쪽) 

 

  저자는 친정어머니의 별세 소식을 듣고 이렇게 적고 있다. 

 

  친정어머니가 11월 9일 별세하셨다는 기별이 왔다. 6 · 25전쟁이 난 후 우리 내외와 우리나라를 위해 줄곧 금식기도를 하며 밤낮으로 걱정하다 돌아가신 어머니, 막내딸인 나를 먼 나라로 시집보낸 후 그토록 보고  싶어 하셨는데 17년 동안 한 번도 못 만난 채 그냥 세상을 떠나셨다. 전쟁이 끝나는 대로 찾아가 뵈려고 마음먹고 있었는데 이제는 영영 어머니를 뵐 수 없게 된 것이다. 어머니가 틈만 나면 낸 사진을 한없이 들여다보는 것이 일과였다는 말을 들을 때 나는 가슴이 미어질 듯 아팠다. 대통령이 어머니 장례식에 다녀오라 권했으나 내 마음에는 여러 생각이 엇갈렸다. 결국에는 떠나기를 포기한 채 바쁜 나날의 일과에 묻혀 슬픈 마음을 달래는 기밖에 없었다. (248쪽)

 

  이 책의 마지막에는 1951년 2월 15일의 일기가 실려 있다.

 

  대통령의 구술을 계속해서 맏응며 차자를 해나가는 내 손끝은 모두 부르트고, 눈은 너무나 피로해서 뜰 수조차 없다. 나는 염려 말고 쉬도록 하라는 대통령의 권유로 잠자리에 들었으나 잠이 오질 않았다. 독립운동 중 가장 힘든 고비였던 1941년, 대통령의 『Japan Inside-Out(일본 내막기)』의 원고를 세 차례나 타자했을 때도 손끝이 부르트고 눈이 짓무른 경험이 있었다. 당시 대통령은 나를 워싱턴의 포토맥 강변으로 데리고 가 '아리랑' 노래를 부르며 위로해 주었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를 넘어간다. 청천하늘엔 별들고 많고, 우리네 가슴속엔 시름도 많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를 넘어간다. 오다가다 만난 '님'이지만 살아서나 죽어서나 못 잊겠네."

  끝 구절은 대통령이 나를 위해 지어서 넣은 가사다. 이 노래가 떠오를 때는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난다. (442쪽)

 

 

* 블로그주: 여기 싣지 못한 책 속의 사진들/ 프란체스카 여사의 프로필 사진(p.122), 위쪽- 한복 차림의 프란체스카 여사/ 아래쪽 이승만 대통령과 프란체스카 여사(p.124), 『프란체스카의 난중일기』(2010) 초판본(p. 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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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종고 지음 『한국을 사랑한 세계작가들 세계의 책속에 피어난 한국 근현대 3』 에서/ 2020. 7. 17. <와이겔리> 펴냄

 * 최종고崔鍾庫/ 1947년 경북 상주 출생, 서울 법대 졸업,  독일 프라이부르크(Freiburg)대학에서 박사학위 받은 후 모교 서울법대에서 33년간 법사상사를 가르쳤다, 많은 학술서를 저술하여 2012년 삼일문화상 수상. 2013년 정년 후에 인생의 대도大道라는 생각으로 시인 · 수필가로 등단, 『괴테의 이름으로』(2017) 등 시집과 문학서를 내었다. 현재 <한국인물전기학회>, <한국펄벅연구회>를 운영하고 <국제PEN한국본부>, <공간시낭독회>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