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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재 신채호의 '민족' 호명(발췌)/ 서범석

검지 정숙자 2020. 8. 26. 23:47

 

 

    단재 신채호의 '민족 호명(발췌)

 

    서범석/ 시인 · 문학평론가 · 대진대 명예교수

 

    

  역사가이며 독립운동가, 그리고 사상가였던 신채호(申采浩, 1880~1936, 56세) 선생은 단재丹齋라는 아호에서 보듯이 오직 민족에 대한 '붉은 마음[丹心] 하나로 생애를 물들이고 순국한 인물이다. (p. 128)

 

 

  시문학 작품들과 '민족'

  단재가 세수할 때, 허리와 고개를 굽히지 않았다는 것은 유명한 일화이다. 일제 앞에서 무슨 일이 있어도 어느 방향으로도 고개를 숙이지 않겠다는 신념으로 옷이 다 젖어도 꼿꼿이 서서 물을 얼굴에 찍어 바르며 세수를 했다는 것이다. 그는 역사를 하든지 문학을 하든지 그 무엇을 하든지 오직 '민족'이라는 자장 안에서 양심의 명령에 따라 단심丹心을 지켜낸 인물이다. 그러므로 그의 시 텍스트들 역시 평론, 소설, 역사 등에서 만난 그것과 다름이 없다. 

 

  나는 네 사랑

  너는 내 사랑

  두 사랑 사이 칼로써 베면

  고우나 고운 핏덩이가

  줄줄줄 흘러내려 오리니

  한 주먹 덥썩 그 피를 쥐어

  한 나라 땅에 고루 뿌리리

  떨어지는 곳마다 꽃이 피어서

  봄맞이 하리

   -전문, 「한나라 생각」

 

 

  확증하기는 어렵지만 1910년 4월 중국으로 가는 길에 압록강을 건너며 쓴 것으로 전해지고 있는 작품이다. 1910년대 후반기에 이르러 비로소 근대 자유시가 싹텄다는 문학사적 사실을 생각하면 이 시는 어쩌면 그보다 앞선 시점에 나온 한국 근대시의 촉이 아닌가. 무론 그렇게 주장하기에는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형식이 정형의 구각에서 어느 정도 벗어났다고 볼 수 있고, 내용면에서도 집단적 계몽보다는 개인의 감정을 노래하고 있다는 점 등을 생각하면 시사적인 탐구가 필요하다는 과제를 남기기에 충분한 문제작이다. 이외에 대부분의 작품들은 시조나 가사의 형식으로 되어 있다.

 

 

  너의 눈은 해가 되어

  여기저기 비치우고지고

  님의나라 밝아지게

 

  너의 피는 꽃이 되어

  여기저기 피고지고

  님 날 고와지게

 

  너의 숨은 바람 되어

  여기저기 불고지고

  님 나라 깨끗하게

 

  너의 말은 불이 되어

  여기저기 타고지고

  님나라 더워지게

 

  살이 썩어 흙이 되고

  뼈는 굳어 돌 되어라

  남 나라 보태지게

   -전문,  「너의 것」

 

 

  단재 선생이 1927년 무정부주의 독립운동에 헌신할 즈음에 쓴 그의 대표시 「너의 것」이다. 이 시는 운율의 정형성이 그대로 지켜지고 있는 가사형식의 작품으로 근대시로 보기 어렵다. 단재가 진정으로 문인 또는 시인이 되고자 생각한 적은 없을 것으로 본다. 오로지 그의 '민족'을 소리높이 호명하기 위하여 그가 알고 있는 문학 형식을 쉽게 차용했을 뿐이다. 완성도 높은 예술적 창조가 아니라 민족 독립의 수단으로 사용하면 그것으로 족했던 것이다. 박정규가 편찬한 『단재 신채호 시 전집』(2013)에는 100편의 단재 시를 모아 출간하였는데, 소설에 삽입된 시, 신문의 논설에 삽입된 시까지 발굴하였다. 여기에 실린 시가들의 유형을 ①논설 자체가 전체 시가로 채워진 것, ②논설에 시가가 삽입된 것, ③논설 밖의 지면에 게재된 시가, ④황실 경축 시가 등의 유형으로 분류했다. 이러한 사실은 단재가 자신의 민족사상을 전파하기 위하여 시를 도구로 활용했음을 뜻하는 것이다. (p. 136-138)

 

 

  단재 문학의 역사적 위상

  중국 망명시절 하루는 단재가 한 친구와 푸짐한 중국음식을 먹고 있었다. 그는 음식을 배달하는 소년에게 물었다. "그런데 이 고기는 무슨 고기이기에 이처럼 맛이 유별나지? 어디서 온 거니?" 소년이 대답하기를 일본에서 직접 가져온 동양어라고 대답했다. 일본 음식이라는 사실을 안 단재는 곧바로 화장실로 달려가 먹은 음식을 모두 토해 버렸다는 것이다. 철두철미한 주체적 민족주의로 반일사상이 체질화된 선생의 모습을 보여주는 일화이다. 그러하기에 위에서 살펴본 대로 단재의 문학은 철저하게 민족 주체성 수호의 도구로 활용되었다. 자연히 예술적 완성도에 문제가 있을 수 있다. 사정이 이럼에도 불구하고 단재의 문학사적 의미는 뚜렷하다고 본다.

  첫째, 근대문학 형성기에 소설, 문학평론, 시 등의 분야에서 탁월한 작품을 남김으로써 한국근대문학의 할아버지로서의 역사적 임무를 수행했다. 근대문학 연구의 첫 장에 단재를 제외하지 않아야 옹근 문학사가 논의될 수 있을 것이다.

  둘째, 대부분 을사늑약 이후에 집필한 것으로 모든 작품은 민족 주체성 회복이라는 주제에서 한 반짝도 떨어지지 않았다. 그 시대의 그에게는 너무나 당연한 것이지만, 이후 한국 문학의 진로에 결정적 방향을 선도한 것이다. 단재가 불러낸 '민족'은 식민지시대를 건너야 했던 온 겨레가 호명한 '민족'이 된 것이다. 단재 선생의 저작이라는 강에서 '민족'이라는 싱싱한 고기 떼를 낚아 살림망에 담는다. 앞으로 어떤 지점에서 호명해도 '민족'은 바로 응답하고 나올 것이다. (p. 138-139_終) 

 

 

  ※ 서범석 교수가 쓰는 우리詩의 시사詩史를 처음으로 소개한다. 시를 창작하는 시인이나 시를 사랑하고 이해하고자 하는 일반독자도 알아두면 도움이 되리라 여겨 기획 연재한다. <본지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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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와소금』 2020-가을호 <기획 연재_ 詩史 낚시 ②> 에서

 * 서범석/ 시인/ 문학평론가/ 대진대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