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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단시조인가?/ 유자효

검지 정숙자 2020. 8. 4. 02:25

 

 

    왜 단조인가?

 

    유자효/ 시조시인

 

 

  한국 시가의 본류는 향가, 고려가요, 경기체가, 시조로 이어 온다. 시조는 고려 중기에 그 형식이 3장 6구로 정착되었다. 조윤제 박사의 「시조자수고」(1930. 11 · 신흥)에서 시조의 기본형이 초장 3 · 4 · 4(3) · 4, 중장 3 · 4 · 4(3) · 4, 종장 3 · 5 · 4 · 3이나 상당한 신축성이 있다고 정리하였다. 문자로 정착된 최초의 시조는 역동 우탁(1263~1343, 80세)「탄로가」 2수이다. 그 가운데

 

  한 손에 막대 잡고 또 한 손에 가시 쥐고

  늙는 길 가시로 막고 오는 백발 막대로 치렸더니

  백발이 제 먼저 알고 지름길로 오더라

 

  는 널리 불려 춘향전에 이르기까지 숱하게 패러디되었다. 「백발가」에 "오는 백발 막으려고 우수에 도끼 들고, 좌수에 가시 들고, 오는 백발 두드리며 ···가는 홍안 절로 가고, 백발은스스로 돌아와, 귀 밑에 살 잡히고 검은 머리 백발 되니"라는 구절은 이 시조가 널리 회자되어 전승되었음을 알게 한다.

  시조는 3장 6구의 단수형 평시조로 지어지고 불리어 왔다. 그러던 것이 조선 중기 선조대에 이르러 연시조가 등장했다. 퇴계 이황의 「도산 12곡」, 율곡 이이의 「고산9곡가」, 송강 정철의 훈민가, 고산 윤선도의 「어부사시사」 「오우가」 등이 그러하다. 이는 단시조의 "한계를 보완 내지 극복하기 위한 전략의 결과로 이루어진 것이다."(2006. 8. 김용직 '시조, 그 국민시가 양식으로서의 과거, 현재, 미래')

  영 · 정조 시대에 이르러서는 종장을 늘린 엇시조가 나타나고, 이어 중장과 종장을 심하게 변형한 사설시조가 등장했다. 이는 "선행하는 사대부 시조의 관념성과 대립되는 사실적 요소에 의한 현실적인 시다. 사설시조가 단명했고 급격히 쇠퇴하였지만 그것은 다음에 올 자유시의 내적 배경이 된 것만은 틀림이 없다."(2006. 8. 박철희 '현대시조 100년, 그 경과와 문젯점')

  현대시조의 효시로는 1906년 7월 21일 대한매일신보에 실린 대구 여사의 「혈죽가」를 뽑는다. 을사늑약에 항거해 민영환이 자결하자 그를 추모하고 애도한 시였다. 최초의 신시인 육당 최남선의 「해에게서 소년에게」가 1908년 11월, 『소년』 창간호에 발표됐으니 신체시보다 2년여 빨랐다. 1906년부터 1918년까지 발표된 시조가 660여 수를 헤아린다. 당시 시조가 활발하게 창작되었음을 알게 한다.

  현대시조가 확실한 이론적 바탕을 갖게 된 것은 가람 이병기(1891~1968, 77세)에 의해서였다. 그는 1913년 공립보통학교에서 교편을 잡으면서부터 시조를 중심으로 시가문학을 연구, 창작하였다. 1926년, 시조회를 발기하였고, 1928년 이를 가요연구회로 개칭하여 조직을 확장하면서 시조 혁신을 제창하는 논문들을 발표했다. 「시조란 무엇인가」(동아일보, 1926. 11. 24~12.13.), 「율격과 시조」(동아일보, 1928. 11. 28.), 「시조원류론」(신생, 1929. 1`5.), 「시조는 창이냐 작이냐」(신민, 1930. 1.), 「시조는 혁신하자」(동아일보, 1932. 1. 23~2. 4.), 「시조의 발생과 가곡과의 연구」(진단학보, 1934. 11.) 등 20여 편의 시조론을 잇따라 발표했다. 그는 시조와 현대시를 동질로 보고 시조창에서의 분리, 시어의 조탁과 관념의 형상화, 연작連作 등을 주장하여 시조 혁신을 선도하면서 그 이론을 실천하여 1939년 『가람시조집』(문장사)을 출간하였다. 그는 동아일보의 시조 모집 '고선考選'을 통하여 신인 지도에 힘썼고, 1939년부터는 『문장』에 조남령, 오신혜, 김상옥, 장옹두, 이호우 등 우수한 신인들을 추천해 시조 중흥의 기틀을 마련했다.

  광복 이후, 시조는 눈부신 양적, 질적 팽창을 가져왔다. 이제 시조는 국민시를 넘어 세계화를 꿈꾸고 있다. K-Pop, K-Movie에 이어 K-Poem으로 진출하고자 하는 것이다. 여기에는 일본의 단가와 하이쿠가 어떻게 세계문학이 되었는지를 보는 것이 도움이 된다.

  유럽에서의 일본 붐은 1851년 런던 세계박람회가 효시가 된다. 처음 보는 일본의 문물은 서양인들의 이목을 끌었고, 이국적인 동양풍 문화에 매료됐다. 미국 작가 존 루터 롱은 게이샤를 소재로 한 소설을 썼으며, 이는 푸치니에 의해 「나비부인」이란 이름으로 오페라화되었다. 일본의 풍속화 우키요에浮世繪도 수집 대상이 되었다. 고흐의 그림에도 벽에 걸려 있는 우키요에가 등장한다.

  문학에서는 일본 고유의 시 단가和歌와 하이쿠俳句가 서양인들을 매료시켰다. 5 · 7 · 5자로 이루어진 17자의 짧은 정형시, 거기에 7 · 7자의 14자를 더한 31자의 단시는 촌철살인의 매력으로 그들에게 다가갔다. 서양 시인들은 그들의 언어로 단가와 하이크를 짓기 시작했다. 여기에 세계적인 시인 에즈라 파운드가 영어로 하이쿠를 지어 발표하자 일약 세계시의 반열에 일본 전통시가 합류하게 되었다.

 

  The apparition of these faces in the cromd:

  Petals on a wet, black bough.

       In a Station of the Metro(Ezra Pound)

 

  인파 속 이 얼굴들의 환영:

  축축하고 검은, 가지의 꽃잎들.

       지하철 역에서

 

  여기에서 우리는 시조 세계화의 한 가능성을 본다. 한국의 자유시는 서양에서 온 것이다. 한국의 시라고 할 때, 한국만의 시 형식이 있다는 것은 강점이 된다. 우리에게는 800년 된 문학 장르가 있다. 그것은 자수율을 갖고 있는 정형시인데 현대에도 쓰이고 있는 시조다. 여기까지는 일본의 하이쿠나 단가의 경우와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런데 하이쿠나 단가가 그 형식을 엄격하게 지키는 데 비해 시조는 분명하다. 엇시조, 사설시조가 있으며, 연시조가 널리 지어지고 있다. 여기에다가 형식의 파괴를 시도하는 시조시인들도 있다. 이것이 국내에서는 큰 문제가 될 것이 없으나 시조의 세계화를 위해서는 문제가 된다.

  우선 엇시조나 사설시조를 외국어로 번역하면, 외국인들이 볼 때 자유시와 구분이 어렵다. 왜 그것이 한국의 고유 시 형태인지 분간하기 어려워지는 것이다. 또한 연시조의 경우도 왜 꼭 시조여야 하는가에 대한 의문이 제기된다. 분방한 자유시의 세계, 심지어 장시와 산문시까지 씌어지는 마당에 번역된 연시조를 한국 고유의 시로 설명하는 데 어려움이 있다.

  한국 시의 세계화를 목적으로 할 때 가장 강점을 갖는 것은 단시조다. 3장 6구 45자 내외의 시조는 긴 설명이 필요가 없다. 한국의 전통시로 곧바로 받아들인다. 나는 외국 시인들에게 영어로 시조 짓기를 강의해 본 적이 있다. 시조의 정형성에 대한 설명을 하고 함께 시조를 지어 보았는데, 그들은 한 시간 안에 영어로 시조를 짓는 것이었다. 그리고 한국의 시라는 데 큰 매력을 느끼는 것이었다. 나는 주한 외국인을 상대로 한 그들의 언어로 시조 짓기도 충분히 가능하다는 생각을 하였다. 해외에 나가 있는 한국문화원에서도 한국문화를 소개하는 데 시조 강의와 시조 짓기가 좋은 무기라는 생각을 하였다.

  단시조는 오늘날과 같은 사이버 시대에 꼭 어울리는 시 형식이다. 손전화 화면에 시 한 편이 쏙 들어온다. 그리고  원리만 이해하면 짓기가 쉽다. 단시조를 무기로 한국 전통시의 세계화에 나설 때가 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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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문학인』 2020-여름호 <이 계절의 쟁점/ 시조>에서

  * 유자효/ 1947년 부산 출생, 1972년 『시조문학』으로 등단, 시집 『성 수요일의 저녁』 『심장과 뼈』 『아직』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