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시

미끄러지다/ 장옥관

검지 정숙자 2020. 7. 31. 02:08

 

 

    미끄러지다

 

    장옥관

 

 

  저절로 미끄러질 리 없다

  양지바른 땅에 핀 돈나물이, 봄의 가지에 돋는 초록이, 밤마다 거듭 되는 악몽이 그저 미끄러질 리

 

  없다 네 속으로 내가 미끄러질 때 시푸른 바닷물 속으로 배가 미끄러질 때 예감도 없이 예고도 없이

  생이 자빠질 때

 

  짚고 일어날 바다도 없이 푹푹 빠져들기만 할 때 미끄러져 뒤집힌 풍뎅이처럼 비극이 돌아갈 때

  잡아줄 손목도 없이

  황토 한 무더기 지붕 덮고 철길 덮고

 

  얼굴을 덮을 때 버둥거리는

  오늘을 따라 저기 또 누가 미끄러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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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문학에스프리』 2020-여름호 <신작 시>에서

   * 장옥관/ 1987년 『세계의 문학』으로 등단, 시집 『하늘 우물』 『달과 뱀과 짧은 이야기』 『그 겨울 나는 북벽에서 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