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끄러지다
장옥관
저절로 미끄러질 리 없다
양지바른 땅에 핀 돈나물이, 봄의 가지에 돋는 초록이, 밤마다 거듭 되는 악몽이 그저 미끄러질 리
없다 네 속으로 내가 미끄러질 때 시푸른 바닷물 속으로 배가 미끄러질 때 예감도 없이 예고도 없이
생이 자빠질 때
짚고 일어날 바다도 없이 푹푹 빠져들기만 할 때 미끄러져 뒤집힌 풍뎅이처럼 비극이 돌아갈 때
잡아줄 손목도 없이
황토 한 무더기 지붕 덮고 철길 덮고
얼굴을 덮을 때 버둥거리는
오늘을 따라 저기 또 누가 미끄러진다
----------------
* 『문학에스프리』 2020-여름호 <신작 시>에서
* 장옥관/ 1987년 『세계의 문학』으로 등단, 시집 『하늘 우물』 『달과 뱀과 짧은 이야기』 『그 겨울 나는 북벽에서 살았다』 등
'외국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숨바꼭질/ 바스코 포파 : 오민석 옮김 (0) | 2020.08.13 |
---|---|
오늘 나는 산책을 했다/ 로베로 데스노스 : 조재룡 옮김 (0) | 2020.08.12 |
습지들*/ 페르난두 페소아 : 김한민 옮김 (0) | 2020.07.16 |
기울어진 비/ 페르난두 페소아 : 김한민 옮김 (0) | 2020.07.16 |
해상 송시(부분)/ 페르난두 페소아 : 김한민 옮김 (0) | 2020.07.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