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시

기울어진 비/ 페르난두 페소아 : 김한민 옮김

검지 정숙자 2020. 7. 16. 00:03

 

 

    기울어진 비*

 

    페르난두 페소아(1888-1935, 47세)

 

 

  

 

  무한한 항구에 대한 내 꿈이 이 풍경을 가로지르고

  부두에서 멀어지면서 수면에 그림자로

  햇빛 비치는 저 오래된 나무들의 잔상을 끌고 가는

  거대한 배의 돛들로 색깔은 투명하다···

 

  내가 꿈꾸는 항구는 그늘지고 창백하고

  이 풍경은 이쪽을 비추는 햇살로 가득하다···

  그러나 내 마음속에서 오늘의 태양은 그늘진 항구

  그리고 항구를 떠나는 배들은 햇볕을 받는 나무들···

 

  이중으로 해방되어, 나는 아래의 풍경을 떨쳐버렸다···

  부두의 그림자는 깨끗하고 평온한 길

  마치 벽처럼 세워지고 일어나는

  그리고 배들은 나무 둥치들 속을 지나간다

  수직으로 수평적으로,

  잎사귀들 사이로 닻줄을 하나씩 물속에 떨어뜨리며···

 

  내가 누구를 꿈꾸는지 나도 모른다···

  갑자기 항구의 바닷물이 전부 투명하다

  그리고 나는 바닥을 본다, 마치 그곳에 펼쳐진 커다란 판화 같은,

  이 풍경 전부를, 줄지어 선 나무들, 저 항구의 이글거리는 길,

  그리고 항구에 대한 내 꿈과 이 경치를 보는 내 시선 사이로

  지나가는 항구보다 더 오래된 배의 그림자

  그것이 내 가까이로 다가와 내 안으로 들어오고,

  내 영혼의 다른 면을 스쳐 지나간다···

 

   * '사선으로 내리는 비'라고 옮길 수도 있다.

 

 

 

 

  오늘 내리는 빗속에서 교회 내부가 밝혀진다.

  켜지는 촛불마다 유리창을 두드리는 더 많은 비···

  빗소리를 듣는 건 날 기쁘게 한다, 왜냐하면 그건 불 밝혀진 사원이니,

  그리고 바깥에서 바라보는 성당의 유리창은 안에서 들리는 빗소리···

 

  높은 계단의 화려함은 언덕들을 거의 보지 못하는 나

  비 사이로 그것은 제단 위 융단에서 너무도 장엄한 금···

  합창대의 라틴어 노랫소리가 들리고, 내 유리창을 흔드는 바람.

  합창대의 존재에 물줄기가 쉿쉿 소리를 내는 게 느껴진다···

 

  미사란 지나가는 한 대의 자동차

  오늘같이 슬픈 날에 무릎 꿇은 저 신자들 사이로···

  갑작스러운 바람이 한층 더한 광채 속에서 흔들어댄다

  성당의 축제와 빗소리가 모든 걸 삼키고

  신부의 목소리만 들릴 때까지 물은 저 멀리 흘러간다

  자동차 바퀴 소리와 함께···

 

  그리고 성당의 불들이 꺼진다

  그치는 빗속에서···

 

 

  

 

  이집트의 거대한 스핑크스가 이 종이 안에서 꿈을 꾼다···

  나는 쓴다    그리고 그것이 내 투명한 손을 통과해 나타난다

  그리고 종이 귀퉁이에 피라미드가 세워진다···

 

  나는 쓴다    내 깃펜 펜촉이

  키오프스 왕*의 옆모습이 되는 걸 보는 게 거슬린다···

  나는 갑자기 멈춘다···

  모든 것이 어두워진다··· 나는 시간이 빚어낸 심연 속으로 추락한다···

  피라미드 아래 묻혀 나는 이 램프의 밝은 불빛 아래 시를 쓰고

  이집트 전체가 내가 깃펜으로 긋는 선들로 나를 내리누른다···

  스핑크스가 속으로 웃는 게 들린다

  나의 깃펜이 종이 위를 내달리는 소리···

  내가 볼 수 없는 거대한 손이 나를 관통하여,

 

  내 뒤에 있는 천장 구석으로 모든 걸 쓸어버리고,

  내가 쓰고 있는 종이 위, 그것과 쓰고 있는 깃펜 사이에

  키오프스 왕의 시체가 눈을 부릅뜨고 날 바라보며 누워 있다,

  그리고 교차하는 우리의 시선들 사이로 나일 강이 흐르고

  깃발을 휘날리는 배들의 환희가 떠돈다

  사선으로 퍼지는 가운데

  나와 내가 생각하는 것 사이에서···

 

  오래된 금으로 장식된 키오프스 왕의 장례식 그리고 나···!

 

   * 기원전 2600년경 이집트 제4왕조의 2대 왕이었던 인물.

 

 

    Ⅳ

 

  작은 탬버린 같은 이 방의 적막···!

  벽들은 안달루시아*에 있다···

  빛의 흔들림 없는 광채 속에 관능적인 춤들이 있다···

 

  갑자기 온 공간이 멈춘다···,

  정지하고, 미끄러지고, 펼쳐진다···,

  그리고 천장의 한 모서리, 그로부터 훨씬 더 먼 곳에서

  흰 손들이 비밀의 창문들을 열고,

  저 바깥은 봄날이기에

  떨어지는 제비꽃 가지들이 있다

  눈을 감고 있는 나의 위로···

 

   * 플라멩코 춤이 유래한 것으로 알려진 스페인의 자치도시.

 

 

   

 

  저 바깥에는 햇볕의 선회, 회전목마의 말들···

  나무들, 바위들, 언덕들, 내 안에서 멈춘 채 춤춘다···

  불 밝힌 시장의 절대적인 밤, 저 바깥 한낮의 달빛,

  그리고 축제의 온 불빛들이 정원 울타리에서 소리를 낸다···

  항아리를 머리에 인 한 무리의 소녀들

  태양 아래 있다 못해 저 바깥을 지나서,

  시장 가득히 서로 달라붙어 있는 군중 사이를 가로질러 간다,

  시장의 가판대 불빛들, 밤과 달빛에 온통 뒤섞인 사람들,

  그리고 두 모리가 만나고 서로 섞인다

  둘인 하나가 될 때까지···

  시장과, 시장의 불빛과, 시장을 거니는 사람들,

  그리고 시장을 집어 공기 중으로 들어 올리는 밤은

  한껏 햇볕을 받는 나무 꼭대기에도 있고,

  태양 아래 빛을 발하는 바위들 아래에서도 눈에 띄고,

  소녀들이 머리에 인 항아리의 다른 쪽에서도 나타난다,

  그리고 이 모든 봄의 풍경은 시장 위에 떠 있는 달,

  그리고 소리와 빛 가득한 시장 전체는 화창한 이날의 땅바닥

 

  갑자기 누군가가 이 이중의 시간을 마치 체처럼 흔든다

  그리고, 두 현실의 가루가, 뒤섞여서, 떨어진다

  돌아올 생각 없이 출항하는 선박들의

  항구를 그린 그림들로 가득한 내 두 손 위로···

  내 손가락 위의 검고 흰 금가루···

  내 두 손은 시장을 떠나는 저 소녀의 발걸음,

  오늘 이날처럼 고독하고 만족스러운···

 

 

    

 

  지휘자가 지휘봉을 젓는다,

  나른하고 슬픈 음악이 시작된다···

  내 유년을 떠올린다, 그날을

  마당 한편에서 노닐던

  담벼락에 던지는 그 공 한쪽 면엔

  초록 개의 미끄러짐, 다른 쪽 면에는

  노란 기수騎手를 태우고 달리는 푸른 말 한 마리···

 

  음악이 이어진다, 그리고 여기 내 유년 안에

  갑자기 나와 지휘자 사이, 하얀 담벼락에,

  공이 왔다 갔다 한다, 한 순간엔 초록 개,

  다음 순간엔 노란 기수를 태운 푸른 말이···

 

  온 극장이 나의 마당이고, 나의 유년은

  모든 곳에 있고, 그 공은 음악을 연주하기 시작한다

  슬프고 희미한 음악이 나의 마당을 거닌다

  노란 기수로 변하는 초록 개로 갈아입고···

  (나와 악사들 사이의 공운 어찌나 빨리 도는지···)

 

  나는 내 유년에다 그걸 던지고 그것은

  나의 주위에 있는 무대 전체를 가로질러

  노란 기수와 초록 개와 노닌다

  그리고 담벼락 꼭대기에 나타나는 푸른 말

  나의 마당에서··· 그리고 음악이 공들을 던진다

  나의 유연에다··· 그리고 내 마당 담벼락은

  지휘봉 동작들과 초록 개의 어지러운 회전들 그리고

  푸른 망들과 노란 기수들로 이루어졌다···

 

  극장 전체가 음악으로 된 흰 담벼락

  내 유년, 노란 기수를 태운 푸른 말에 대한

  나의 그리움을 초록 개가 뒤쫓는 곳···

 

  그리고 한쪽에서 다른 쪽으로,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나무들이 있는 곳, 그리고 연주하는 오케스트라가 있는

  꼭대기 근처의 가지들 사이로,

  내가 살던 공들이 진열된 가게로

  그리고 내 유년의 기억들 사이로 가게 주인이 미소 짓는다···

 

  그리고 음악이 무너지는 벽처럼 멈추고,

  공은 나의 끊긴 꿈의 절벽 아래로 구른다

  그리고 푸른 말 위에서, 지휘자, 검은색으로 변하는 노란 기수는

  감사를 표하고, 달아나는 벽 위에 지휘봉을 내려놓으며

  고개 숙여 절한다, 미소 지으며, 머리 위에 흰 콩을 얹은 채,

  그의 등 뒤로 사라지는 흰 공을···

    -1914. 3.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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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페르난두 페소아 시가집 『내가 얼마나 많은 영혼을 가졌는지』에서, 2018. 10. 10. 1판 1쇄/ 2018. 10. 23. 1판 2쇄 <문학과지성사(대산세계문학총서 150)> 펴냄

  * 페르난두 페소아(Fernando Pessoa(1888-1935, 47세)/ 포르투갈 리스본 출생의 시인. 일생 동안 70여 개의 이명異名을 사용하여 다양한 분야의 글을 다양한 문체로 썼다. 대표적인 이명異名으로는 리카르두 레이스, 알베르투 카에이루, 알바루 드 캄푸스 등이 있다. 의붓아버지가 영사로 근무하던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고 17세에 혼자 돌아와 리스본 대학교 문학부에 들어가나 곧 그만두고 무역 통신문 번역가로 생계를 이어갔다./ 1912년 『아기아』에 포르투갈 시에 대한 평론을 발표하면서 등단했고, 1915년 포르투갈 모더니즘의 문을 연 것으로 평가받는 실험적인 잡지 『오르페우』를 창간하여 편집자 겸 필자로 활동했으며, 직접 운영하는 출판사에서 영어로 쓴 시집을 펴내기도 했다. 그러나 생전에 푸르투갈어로 출간된 책은 시집 『메시지』(1934) 하나뿐이다. 이어 페소아는 수년간 적은 단상을 모은 『불안의 책』을 출간하려 했으나 실현하지 못하고, 이듬해인 1935년 47세의 나이에 간경화로 생을 마쳤다./ 사후에 엄청난 양의 원고들이 발견되었는데, 그중 페소아가 생전에 구체적으로 출판을 계획한 몇 안 되는 책 중 하나인 『시가집』은 페소아 본명으로 서명된 시들로 엮여 있다. 오늘날까지도 여러 나라에서 유고 분류와 출판 작업이 진행 중인 페소아는, 포르투갈 문학이 세계 문학사의 한 장을 차지하게 한 작가로 평가받는다.

* 김한민(옮긴이)/ 글그림 작가. 문화 계간지  『엔분의 일(n/1)』편집장으로 일했다. 포르투 대학교에서 포르투갈 문학을, 리스본 고등사회과학연구원(ISCTE) 에서 인류학을 공부했으며, 페르난두 페소아의 글을 번역하고 소개하는 작업을 이어오고 있다. 지은 책으로 그림 소설 『유리피데스에게』 『혜성을 닮은 방』 『카페 림보』  『책섬』 『비수기의 전문가들』, 그림 에세이 『그림 여행을 권함』 외 다수의 그림책과, 『페소아    리스본에서 만난 복수(複數)의 화신』이 있다. 엮고 옮긴 책으로  『페르난두 페소아    페소아와 페소아들』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