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시

습지들*/ 페르난두 페소아 : 김한민 옮김

검지 정숙자 2020. 7. 16. 01:38

 

 

    습지들*

 

    페르난두 페소아(1888-1935, 47세)

 

 

  내 금빛 영혼을 갈망들로 비벼대는 습지들···

  다른 종들의 먼 종소리··· 황금색 밀밭이 창백하다

  노을의 잿더미 속에서··· 내 영혼으로 육욕의 한기寒氣가 흐른다

  이렇게나 한결같구나, 시간이여···! 야자수 꼭대기들에서 흔들린다···!

  잎사귀들이 응시하는 우리 안의 침묵··· 가느다란 가을

  희미한 새의 노래의··· 침체 속에, 잊힌 푸름

  아 시간 위에 발톱을 물리는 갈망의 함성은 어찌나 고요한지!

  나의 경탄은 우는 것 이외의 것을 얼마나 열망하는지!

  두 손을 저 너머로 뻗쳐보지만, 뻗치면서 난 이미 본다

  내가 욕망했던 그것이 원했던 그것은 아님을···

  불완전한 심벌즈··· 오 그토록 오래된

  시간   스스로로부터 추방하는 시간! 침범하는 후퇴의 물결

  기절할 때까지 계속되는 나 자신으로의 도피,

  그리고 현존하는 나에게 그토록 몰두하여, 마치 내가 망각된 듯···!

  있었음이 없는, 가짐이 부재한, 후광의 유체···

  신비는 다른 존재가 되는 나를 안다··· 무한 위에 월광···

  보초병은 꼿꼿하다   창은 땅에 딛고서

  그것은 그보다 더 높다··· 이 모든 게 다 뭘 위해서인가··· 평범한 하루···

 

  엉뚱한 덩굴식물들이 시간으로 저 바깥들을 핥고 있다···

  지평선들은 오류의 연쇄들인 공간으로 눈을 감는다···

  미래의 고요들의 아편 합주들··· 멀리 떨어진 기차들···

  나무들 사이로··· 멀리 보이는 문들··· 그토록 무쇠의!

    1913. 3. 29. 

 

 

   * 이 시는 페소아가 창안한 문학 사조 중 하나인 '파울리즘Paulismo' (직역하면 '습지주의' 또는 '늪주의')의 전범이 된 시로 그가 창간한 전위 문예지 『오르페우Orpbeu』에 발표되었는데, 독자를 혼란시킬 목적으로 쓰였기 때문에 의미론적인 이해보다는, 상징들의 낯선 배치와 시각적 효과에 주목하는 독해가 일반적이다.

 

 

  ----------------

  * 페르난두 페소아 시가집 『내가 얼마나 많은 영혼을 가졌는지』에서, 2018. 10. 10. 1판 1쇄/ 2018. 10. 23. 1판 2쇄 <문학과지성사(대산세계문학총서 150)> 펴냄

  * 페르난두 페소아(Fernando Pessoa(1888-1935, 47세)/ 포르투갈 리스본 출생의 시인. 일생 동안 70여 개의 이명異名을 사용하여 다양한 분야의 글을 다양한 문체로 썼다. 대표적인 이명異名으로는 리카르두 레이스, 알베르투 카에이루, 알바루 드 캄푸스 등이 있다. 의붓아버지가 영사로 근무하던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고 17세에 혼자 돌아와 리스본 대학교 문학부에 들어가나 곧 그만두고 무역 통신문 번역가로 생계를 이어갔다./ 1912년 『아기아』에 포르투갈 시에 대한 평론을 발표하면서 등단했고, 1915년 포르투갈 모더니즘의 문을 연 것으로 평가받는 실험적인 잡지 『오르페우』를 창간하여 편집자 겸 필자로 활동했으며, 직접 운영하는 출판사에서 영어로 쓴 시집을 펴내기도 했다. 그러나 생전에 푸르투갈어로 출간된 책은 시집 『메시지』(1934) 하나뿐이다. 이어 페소아는 수년간 적은 단상을 모은 『불안의 책』을 출간하려 했으나 실현하지 못하고, 이듬해인 1935년 47세의 나이에 간경화로 생을 마쳤다./ 사후에 엄청난 양의 원고들이 발견되었는데, 그중 페소아가 생전에 구체적으로 출판을 계획한 몇 안 되는 책 중 하나인 『시가집』은 페소아 본명으로 서명된 시들로 엮여 있다. 오늘날까지도 여러 나라에서 유고 분류와 출판 작업이 진행 중인 페소아는, 포르투갈 문학이 세계 문학사의 한 장을 차지하게 한 작가로 평가받는다.

* 김한민(옮긴이)/ 글그림 작가. 문화 계간지  『엔분의 일(n/1)』편집장으로 일했다. 포르투 대학교에서 포르투갈 문학을, 리스본 고등사회과학연구원(ISCTE) 에서 인류학을 공부했으며, 페르난두 페소아의 글을 번역하고 소개하는 작업을 이어오고 있다. 지은 책으로 그림 소설 『유리피데스에게』 『혜성을 닮은 방』 『카페 림보』  『책섬』 『비수기의 전문가들』, 그림 에세이 『그림 여행을 권함』 외 다수의 그림책과, 『페소아    리스본에서 만난 복수(複數)의 화신』이 있다. 엮고 옮긴 책으로  『페르난두 페소아    페소아와 페소아들』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