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슬 프로젝트-11
정숙자
생존// 햇빛이 필요했다. (중이염이 엽록소를 축내고 있었다) 규격화된
저녁산책을 한낮으로 옮겼다. 외투, 털모자, 마스크와 장갑, 목도리도 단단
히 에둘렀지만 몰아닥친 한파가 슬픔을 보장하는 길, …로
안경을 걸치고 책을 읽으며 걸었다. 걷는 독서엔 몰입의 매혹이 있다. 아
무것도 하지 않고 놔두는 시간은 멀리 달아나버리고 만다. 그 시간은 알 수
없는 곳으로 사라져 영원히 돌아볼 수조차 없게 된다.
수십 마리의 비둘기가 나를 따라 걷고 있었다. 비둘기들은 흡사 내 검은
외투의 그림자였다. 뭘까? 웬 일일까? 순간 나는 빙의되었다. 낮았다. 게다
가 몹시 배가 고팠다. 한파가 슬픔을 보장하는 길, …은
곡물 가게를 떠오르게 했다. 외투 주머니 속 만 원이 만져졌다. 나는 잠시
비둘기들과 헤어져 (지하상가에 마트가 있다) ‘깨끗한 늘보리’ 한 봉투를 샀
다. 얼어붙은 분수대 옆 훤한 보도블록에 주욱 뿌렸다.
“맛있어. 맛있어” 여념 없는 비둘기들을 뒤로하고 나는 다시 책을 읽으
며 돌아온다. 의지에 갇힌 시간은 섣불리 도망가지 못한다. 기억은 시간의
화석이므로…, 몰아닥친 한파가 슬픔을 보장하는 길, …도
-전문-
(※ 책에 실린 이후 부분은 편집상의 착오임을 밝힙니다.)
----------------------------
* 『이상』2015-봄호/ 신작시
'그룹명 > 나의 근작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협시 2 (0) | 2015.03.27 |
---|---|
협시 1 (0) | 2015.03.27 |
이 꽃, 이 꽃들 (0) | 2015.01.07 |
이슬 프로젝트- 9/ 정숙자 (0) | 2014.12.13 |
이슬 프로젝트- 8 (0) | 2014.12.0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