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슬 프로젝트- 8
정숙자
달팽이 레이스// (볼펜만 잘 나와도 행복하다. 이 뻑뻑한 친구 던져버
릴수도 없고, 한 템포 늦게 기어 나오는 머리. 쥐어박고 싶지만 그랬댔자
내 주먹만 질릴 것이다.) 참겠습니다. 바닥까지 수행하겠습니다. 네네 알
겠습니다. 이런 짓도 쌓으면 탑이 될까요? 뱅뱅 문지르고, 달래고, 통사정
해도 안 나올 때까지 쓰겠습니다. 한 템포 늦은 거, 뻑뻑한 거 어디 이 친
구뿐이겠습니까. 그래도 다행입니다. 고맙습니다. 참고말고요. 네네 이 친
구, 황모필도 아니면서 비백체로 버티려 듭니다.
이럴 땐 한 자만 잘 풀려도 약진입니다. 늦추겠습니다. 너무 내달려 따
라잡지 못할 수도 있겠습니다. 천천히 쓰도록 애쓰겠습니다. 밀리는 물결
때문에 늘 초고속 초서체였지만 이 친구 다할 때까지는 한 호흡 자제하겠
습니다. 버리는 일, 새 걸로 바꾸는 일은 쉽습니다. 하지만 쉬운 게 모두
별빛은 아니겠습죠. 어려움에 한 표 두겠습니다. 속도 유보합니다. 네네
저 또한 이 종족과 동족. 제가 저를 쓰지 못하게 되는 그때 비로소, ―저도
누군가의 뻑뻑한 볼펜이었음을 깨닫겠습니다.
* 『시와표현』2014-겨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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