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온문학』2014-창간호(가을)/ 명시집 순례
시로 쓴 자서전적 시학의 언어
-정숙자 시집,『뿌리 깊은 달』(천년의 시작, 2013)
강기옥
프롤로그 - 사회학으로서의 시의 기능
농경국가에서는 농업기구나 농사일에 관한 언어가 발달하고 해양국가에서는 배와 고기잡이에 관한 언어가 발달한다. 군사도시에서는 일반인들의 언어에 군인들의 특수용어가 잘 나타나듯, 광산지역 또한 노다지와 같은 신조어가 나타난다. 이로 미루어 문화적 환경 속에서 사는 사람들은 우아하고 교양이 있는 문학적 언어를 사용한다. 흔히 ‘언어가 곧 그 사람’이라고는 하는 말은 말 속에 내재해 있는 그 사람의 인격과 품위를 지칭한다.
언어는 통일되거나 고정된 불변의 것이 아니라, 지역에 따라 달리 나타나는 사회적 산물이다. 그러면서도 말을 하는 사람에 따라 용어의 선택과 표현 방법이 각기 다른 것은 언어가 사회적 소산이면서도 철저히 개인적 산물임을 뜻한다. 비근한 예로 나이가 든 언중(言衆)들이 ‘손자’보다 ‘손주’에 더 정감을 느꼈는지 자꾸만 손주라 하는 바람에 손주도 복수표준어로 인정받았다. 그러나 먼 훗날에는 분명 손주가 손자를 대신하여 단독 표준어로 변할 것은 명약관화한 사실이다. ‘셔블’이나 ‘불휘’가 오랜 세월을 지나는 동안 발음하기 쉽게 ‘서울’이나 ‘뿌리’로 바뀐 것은 언중에 의한 사회현상인데 예전의 말이 더 고상하다 하여 고어(古語)의 사용을 고집하면 의사소통에 문제가 있다. 언어는 곧 사회적 약속이기 때문이다.
주지하듯 언어의 이러한 특성을 언어의 ‘사회성’과 ‘역사성’이라 한다. 이를 변화의 유무로 보면 언어의 사회성을 ‘불변성’, 언어의 역사성을 ‘가변성’이라 한다. 결과적으로 언어는 개인이나 집단에 의해 작위적으로 바뀔 수 없는 ‘불변’과 사회적 현상으로 자연스럽게 변하는 ‘가변’의 개념을 내포하고 있다. 결국 인간은 상반된 두 개념을 지닌 언어를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불편하거나 어려움을 느끼지는 않는다. 언어는 힘들게 배우고 익힌 것이 아니라 어려서부터 온 몸으로 체득한 기능이어서 어떤 규약도 언어의 흐름을 규제하지 않는다. 그것이 학습으로 얻은 후천적 결과물이기보다는 생득적인 도구로서 모국어가 주는 자유와 편의성이다.
불변성과 변화성, 그 상반된 규약의 틈새를 넘나들며 새로운 언어를 창조하고 기존의 언어를 더 아름답게 연마하는 사람은 누구일까?
어린 꼬마 녀석들이 언어의 마술사와 같은 느낌이 들 때가 있다. 꼬마 녀석들은 천진한 생각을 그대로 표현할 뿐 사회 현상에 물들지 않은 시니피에(signifié)를 그대로 발설하여 어린이다운 시니피앙(signifiant)을 창조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비문(非文)일지라도 언어의 참신성은 가히 어른을 놀라게 한다. 성인들 중에서도 그런 언어적 기능을 발휘하는 사람이 문학인이며 시인이다. 자신의 생각을 담아낼 수 있는 언어를 찾아내고 기존의 언어를 다듬는 작업은 문학인들의 특권이자 의무이지만 시인은 짧은 문장에 자신의 생각을 응축해내야 하기 때문에 어느 문인의 작업보다 처절하다. 그래야만 시다운 시가 탄생한다.
한 권의 시집을 읽는 중에 언어가 어떤 단계를 거쳐 발전하고, 어떤 과정을 통해 순화되며 누구의 손으로 정제되어 가는지를 알게 되었다면 그 시는 이미 목적과 기능을 충분히 달성했다. 독자로 하여금 시의 주제에 공감하게 하는 개인적인 기능과 사회를 정화하고 선도하는 기능을 담아냈기 때문이다. 정숙자 시인의 시가 그렇다. 그래서 정 시인의 시를 읽으면 시학(詩學)과 사회학이 별개의 것이 아니라 복합적으로 기능하는 보완적 관계임이 드러난다. 사회학이 사회 자체를 연구의 대상으로 삼아 사회 현상을 직접적으로 기술하고 설명하는 데 비해 문학은 사회 현상을 표현의 대상으로 감시와 비판, 견제와 격려 등의 수법으로 사회를 그려낸다. 그 모두 바람직한 인간생활에 기여해야 한다는 공통분모 속에 다양한 소재의 분자들이 교집합적으로 작용하여 폭넓은 시세계를 그려냈다. 그래서 한 편, 한 편의 시들이 ‘문학은 사회의 표현’이라는 명제를 쉽게 이해하게 한다. 더구나 사회에 바탕을 둔 예술로서 인간의 내면적 욕구를 설명하듯 그려낸 작시(作詩) 시들은 운명적으로 시와 더불어 살아야 하는 정 시인의 삶을 생각케 하는 묘미가 있다.
시로 쓴 자서전적 시학
『김제문학』 19호를 받아들고 ‘특집1’로 실린 정숙자 시인의 시를 읽는 동안은 가뭄에 시달린 농부가 비를 만난 것 같은 느낌, 허기진 상태에서 맛있는 음식을 만난 기분이었다. 독자들로 하여금 세상사를 잊고 시 속에 빠져들게 하는 잠언과도 같았기 때문이다. 정시인은 시인이라는 직함(?)을 사회에 내민 후 의도적이든 비의도적이든 자신의 삶을 여과 없이 드러내 여타의 시인과 독자에게 다가서는 방법으로 시를 썼다. 그것은 평소 자신이 시를 쓰는 자세와 시를 대하는 태도를 그대로 표현해낸 것이기에 더 의미가 있다. 그래서 평을 쓰기 전 정성스레 사인까지 하여 보내 준 여러 시인들의 시집을 읽기 시작했다. 정 시인이 제시한 시론, 시학의 기준에 맞춰보고 싶었다. 거기에 정숙자 시인이 2013년에 출간한 시집 『뿌리 깊은 달』까지 탐독하여 시평의 방향을 잡았다. 마침 평을 쓰는 중 정숙자 시인이 2014년 6월 30일에 출간한 산문집『행복음자리표』를 보내주어 작가를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한 번도 얼굴을 마주한 적은 없으나 글을 통한 마음의 교통은 충분히 이루어져 시평의 방향이 쉽게 잡혔다. 시집과 산문집을 종합적으로 읽고 느낀 점은 정숙자 시인이 인생을 달관한 자로서 동양적 관조와 사유를 바탕으로 한 주제로 독자들이 내면을 수양하는 데도 큰 도움을 주리라는 것이었다. 프롤로그에서 서술한 언어학적 사설들은 바로 『김제문학』에 실린 열 편의 작품뿐만 아니라 정 시인의 시집과 산문집에서 일상의 언어를 시적 언어로 정화하기 위해 고뇌하는 흔적이 역력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본 평은 시집과 산문집을 읽은 종합적 견해임을 밝힌다.
‘시를 쓰다’와 ‘시를 짓다’는 표현상 어떤 차이가 있을까? ‘짓다’는 죄를 짓다, 미소 짓다, 눈물 짓다, 매듭 짓다 등 다양하게 쓰이나 재료를 들여서 만드는 육체적 작업과 낱말을 나열하여 글을 만드는 정신적 작업으로 대별되는데, 글쓰기가 ‘시를 짓다’에 해당한다. 그에 비해 ‘쓰다’는 일꾼을 쓰다, 모자를 쓰다, 묘를 쓰다, 맛이 쓰다 등으로 쓰이는데 고어에서의 ‘쓰다’는 서(書)와 고(苦)의 의미로 어원이 같다. 요즘 들어 많은 이들이 ‘시를 짓다’보다 ‘시를 쓰다’를 즐겨 사용하는 이유는 글 쓰는 작업이 정신노동으로서 고행이라는 의미가 담겨 있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한 편의 작품을 완성하기까지 숱한 날을 번민하는 정신작업이야말로 쓰디 쓴 고행(苦行)이라서 시 쓰는 작업을 쓰디 쓴 작업과 동일시한 귀결이리라. 그래서 정 시인의 작시(作詩)의 시편들도 ‘시 짓기’보다 ‘시 쓰기’로 해석해야 옳다. 다만 정 시인이 「나의 작시학(作詩學)」에서 “글쓴다 애쓴다 마당쓴다 모자쓴다 돈쓴다 휩쓴다 뒤에서 ’만들어 쓴다가 제일로 맑다”고 밝혔듯 언어는 사회적 규약에 의한 사회성을 유지하면서 개인적인 감각에 이해 적절한 변화를 주는 것은 시인의 능력이다.
작시(作詩)는 중국적 어순이고, 한국적 어순으로는 시작(詩作)이다. 국어사전에도 詩作과 作詩가 같이 실려 있어 어떤 용어를 사용해도 무방하지만 정 시인은 작시(作詩)를 사용했다. ‘作詩’가 시를 쓰는 행위, 동작에 중점을 둔 동사 위주의 어휘라면 ‘詩作’은 시를 쓰는 행위보다 시 자체를 중시하는 목적어 중심의 용어다. 그래서 제목도 「나의 작시욕(作詩欲)」이라 했다. 여기에 숨어있는 또 하나의 내면이 있다. 욕(欲)은 본디 욕(慾)의 원형이나 굳이 마음 심(心)을 떼어낸 욕(欲)을 사용한 것은 자신의 마음을 드러내지 않겠다는 의지다. 겉으로 드러나는 욕심이 아니라 조용히 실천하려는 내면적인 약속이다. 그래서 정 시인의 시는 내면에 깔린 작가적 태도를 바탕으로 시를 읽어야 의미가 살아난다.
한 편의 시가 한 번의 기회다
그 한 번의 실패를 두려워한다
그 한 번의 빨강, 그 한 겹의 주황, 그 한 칸의 노랑 초록
파랑 쪽빛 보랏빛의 박자와 음을
지금 쓰는 이 한 편에 미래가 달린다
지금 쓰는 이 한 편에 과거도 변한다
지금 스는 이 한 편에 오늘이 뚫린다
현관문 박차고 나갈 것인가, -아암
필히 만날 것인가, -좋아
홑소리 닿소리 속에, 찍으려다 만 부호들 속에, 나 자신의
관 속에 들어갈 종결어미는 오직 한 편의 시뿐이므로
외출/만남 그 날갯짓도 한 줄의 언어
좌초와 우울마저도 남쪽에서 불어온 한 마디 가락
시로 인한 일거수일투족 일초일순은 그 모두가 한 틈서
리 시
한 편의 시는 한 쾌의 기도, 한 편의 시는 한 척의 열정, 한
편의 시는 한 떼의 욕망, 한 편의 시는 한 채의 분노, 한 편
의 시는 한 섬의고뇌, 한 편의 시는 한 길의 운명, 한 편의 시
는 한 생의 숙명, 한 편의 시는 한 올의 기적, 한 편의 시
는 한 필의 축복……
모골이 송연하다. 한 행, 한 음보, 한 음절에 목을 맡긴다.
그렇게 나는 쉰여섯에 왔다. 예순 쪽으로도 그렇게 나아가리
라. 나무늘보 걸음이지만, 사실 나무늘보는 나무를 사랑하
기에, 나무에서 떨어지지 않으려고, 신중을 기하느라 그리
웃기며 눈감았던 것. 죽음만이 어느 날 나무늘보를 나무에서
내려놓을 수 있을 거라고
-「나의 작시욕(作詩欲)」 전문
시를 대하는 시인의 자세가 엄숙하다. 시 한 편에 미래가 달리고, 시 한 편에 과거가 변하고, 시 한 편에 오늘이 뚫린다는 관점은 요즘의 후학들이 본받아야 할 태도다. 전반부에 시의 기능을 그와 같이 제시해 놓고 “그렇게 나는 쉰여섯에 왔다. 예순 쪽으로도 그렇게 나아가리라.”며 앞으로도 계속 이런 시를 계속 쓰겠다는 욕심을 드러낸 것이다. 모골이 송연할 만큼 “한 행, 한 음보, 한 음절의 중요성을 감지한 시이기에 한가한 서정이나 신변잡기적 단순함에 빠질 수 없다. 그래서 나무늘보처럼 서두르지 않고 모골이 송연한 작품을 계속 쓰겠다는 다짐이다. 마지막 연에서 나무늘보의 우스꽝스러운 모습은 시답지 않은 시들에 대한 경고다. 그래도 끝까지 시 쓰기를 계속해야 하는 시인은 나무늘보가 나무에서 떨어지면 죽음이듯 시인이 시를 쓰지 않는 것은 곧 죽임이라는 사망선고다.
파스칼은 “사람이 사람이면서 사람인 것을 모르는 것이 불행하다”고 했다. 여기에 시인을 대입하면 시인이 시인이면서 시인인 것을 모르면 불행하다는 내용으로 바뀐다. 이를 확대하면 시인이면서도 시를 쓰지 않고 시를 모르면 그보다 큰 불행은 없다는 경고나 다름없는 문구다. “홀소리 닿소리 속에, 찍으려다 만 부호들 속에, 나 자신의 관 속에 들어갈 종결어미는 오직 한 편의 시뿐이므로” 섬뜩하리만치 처절한 시인의 각오가 나의 시 쓰기는 어떤지 되돌아보게 한다.
가난은 블랙홀이죠. 은행장이 되기로 결심했습니다. 두께
가 육중한 공책을 사고 첫 장에 떠억 간판을 걸었지요. 「생
각은행」총총히 저축했습니다. 이슬비든 는개든 소나기든 다
집어넣었죠. 계절이 쌓이는 동안 잔고가 불어나더군요. 막막
한 날 출금합니다. 남모르는 꽃이 나비가 구름이 강물로 흐
르는 초원. 때때로 별이 뜨기도 합니다. 인터넷뱅킹도 하냐
고요? 웬 걸요. 철저히 오프라인입니다.
오래 전 어느 스님시인한테 들은 이야기인데요. 배를 타고 바
다를 건너는 중이었답니다. 낯선 여인이 다가오더니 “혹시
〇〇시인님 아니세요?” 하더랍니다. “어떻게 저를 ……” 머
뭇거리자 “스님의 시를 읽었어요.” 기쁨을 추스르지 못하더
랍니다. 스님시인은 당시의 행복을 어루만졌습니다. 진정한
독자는 작자가 모르는 독자라고, 그 독자를 만나야 진짜 독자
를 만나는 거라고…… 글 쓰는 사람에게는 세 가지의 기쁨이 있
으니 짓는 즐거움, 발표하는 즐거움, 독자를 만나는 즐거움
이라고…… 저는 거기 이름 붙였습니다. 「문인삼락(文人三樂)」
뒤집으면 곧바로 문인삼고(文人三苦)가 보이지요, 만
시를 통해 세상을 읽죠. 세상을 통해 시를 읽고요. 시인
에게 기댈 곳 있을까요? 알에서 깨어나는 일, 광장 바라보는
일, 굴곡을 맞이하는 일 모두가 벼랑입니다. 삐끗하면 천 길
미궁이에요. 저는 가끔 울었습니다. 울고 싶진 않았지만 그
저 눈물이 나오던 걸요. 그래도 생후 50년, 등단 20여 년 잘
견디고 있습니다, 비결이요? 「독야청청」 그것만이 유산이
었어요. 만건곤한 그늘 말고는 다른 밑거름 얇았으니까요.
-「나의 작시기(作詩記)」전문
시인이 쓴 어느 날의 일기에 해당하는 이 작품은 평소 시인은 어떻게 시상을 정리해야 하는가를 밝힌 시다. 서정주 시인은 한 편의 시를 3년에 걸쳐 완성했고 조지훈 시인은 승무를 작품으로 구상한 지 11개월 만에, 집필하기 시작한 지 7개월 만에 완성했다고 밝히지 않았던가. 두보(杜甫)는 시를 완성하기까지 한 구절 한 구절을 두고두고 퇴고하였다고 한다. 그렇게 시인의 가슴에서 오랜 세월을 두고 시상을 숙성시킨 뒤 표출해낸 것이다. 물론 이백(李白)과 같이 천부적인 기질에 술기운까지 더해 한 편의 시를 일필휘지한 경우도 있으나 이는 기질적인 문제다. 시의 정석은 두보의 경우가 바른 과정이다. 그 비법을 정숙자 시인은 첫 연에서 「생각은행」을 열어 여러 가지 떠오르는 시상들을 저축한다고 했다. 세월이 갈수록 다양한 시상들을 저축할 수 있으니 자연히 잔고가 늘어나는데 거기에 이자까지 곁들여졌으니 시상은 갈수록 풍부하여 시 쓰기에 편리하다는 자신만의 방법을 공개한 것이다.
둘째 연에서는 시인과 독자 사이를 밝혔는데 그것을 교묘히 「문인삼락(文人三樂)」과 문인삼고(文人三苦)의 신조어를 내세워 철학적인 담론을 제시했고 마지막 연에서는 철저한 시인의 자세를 이야기했다. 시를 쓰는 환경은 언제 떨어져 죽을지도 모르는 벼랑이요 기댈 곳 없는 광야 같아서 울음을 참을 수 없는 현실인데 그런 중에도 20여 년 동안 꼿꼿이 버티며 시인으로서 지켜온 자존심을 고백했다. 이는 부드러운 필치로 써내려갔지만 권력에 아부하거나 매문(賣文)하는 행위에 대한 경고다. 문단의 현실을 꼬집은 일종의 비평시다.
상상력 꼽치는 데 왕도는 없다 봉투 만든다
‘헌 종이에 생명을’ 부여하는 일, 죄 아니다 봉투 만든다
부쳐 온 책 봉투는 다시 책 봉투
각양각색 이면지/파지로는 A4용지
넘어간 달력으로는 네 귀의 합 360°짜리
편지 담을 봉투 만든다
칼 풀 자 편지, 이들은 또 한 벌의 내 문방사우
뒤지고 붙이고 반듯반듯 잘라 봉투 만든다
글쓴다 애쓴다 마당쓴다 모자쓴다 돈쓴다 휩쓴다 이 많은
쓴다 뒤에서 만들어 쓴다가 제일로 맑다
읽어도 읽어도 다 못 읽을 책, 지어도 지어도 다 못 지을 시
바람에게 맡기고 봉투 만든다 없는 시간 뚝 떼어 봉투 만든다
봉투 하나 만들면 봉투 하나만큼의 성취
편지 한 통 부치면 편지 한 통만큼의 소통
이런 공기가 곧 시다 봉투 만든다
따뜻한 공기의 입자들에게 국으로 배운다 봉투 만든다
상상력에 왕도는 없다 네 귀의 합 360°짜리
햇빛 담을 봉투 만든다
-「나의 작시학(作詩學)」전문
위 시는 “봉투 만든다”는 구절을 반복하여 음악적 운율을 살린 시다. 정숙자 시인에게 봉투 만드는 작업은 어떤 의미가 있기에 그리 길지 않은 시에 무려 9번이나 반복했을까? 정 시인에게서 편지나 시집, 또는 산문집을 받아본 사람은 그 의미를 이해한다. 편지봉투는 문방구에서 산 봉투가 아니라 정 시인이 직접 만든 봉투다. 내가 받아본 봉투의 속을 봤더니 헌 달력을 오려 만든 것이었고 전면에는 보내는 사람과 받는 사람의 주소, 후면(실상 전면이지만)의 우측 하단에는 “-헌 종이에 생명을-”이라 썼고, 맨 하단에 “No, 14-24”라는 연번호를 썼다. 그러니까 내가 받은 편지는 2014년에 24번째라는 의미다.
디지털 시대에 육필의 주소와 편지를 육필로 썼으니 정 시인의 봉투는 단순한 봉투가 아니라 죽은 폐휴지에 새 생명을 부여하는 부활을 의미한다. 그 부활은 새로운 창조요 관계를 돈독히 하는 소통이다. 그래서 “헌 종이에 생명”을 부여하는 행위로서의 봉투 만드는 작업은 한 장의 종이가 한 그루 나무라는 등식의 자연보호 차원을 넘어 인간관계와 아름다운 인간성의 회복을 의미하는 작업이다. 그래서일까? 정 시인이 타 시인들로부터 시집을 받으면 정 시인의 정서에 맞는 작품을 골라 육필로 쓰고 촌평까지 덧붙여 보내온다.
「나의 작시학(作詩學)」에서 봉투는 “네 귀의 합 360°”의 "문방사우"로 변한다. 봉투의 일반적인 형태가 사각형이므로 합각은 당연히 360°다. 그런데 굳이 네 귀의 합이 360°라야 하는 이유는 가장 원만한 형태의 원이 360°이기 때문이다. 결국 봉투를 만드는 작업은 자신의 인격을 360°로 다듬는 일이요, 이 봉투를 받는 상대가 그런 사람이기를 원하는 기원이다. 그래서 다양한 용도의 ‘쓰다’를 택하여 “만들어 쓴다가 제일로 맑다”고 했다.
「나의 작시욕(作詩欲)」에서 사용한 ‘쓰다’와 같은 표기인데그 쓰기와는 달리 정성을 다해 ‘만들어 쓰는’ 행위야말로 가장 아름답다고 했다. “읽어도 읽어도 다 못 읽을 책, 지어도 지어도 다 못 지을 시”이기에 독서나 시를 짓는 일은 “바람에게 맡기고 봉투 만든다 없는 시간 뚝 떼어 봉투 만든다”로 맺어 봉투 만드는 일이 단순한 작업이 아님을 밝혔다.
정 시인의 시에 나타나는 서술어를 비교해 보면 「나의 작시욕(作詩欲)」에서는 ‘쓰다’를 사용했고 「나의 작시학(作詩學)」에서는 ‘짓다’를 사용했다. 전술했듯 두 언어가 지닌 뜻은 큰 차이는 없지만 두 편의 시에서 분명히 달리 사용했다. 그것은 같은 용어를 반복하여 사용하지 않는 기법이다. 언어는 사회적 약속이면서도 개인의 취향에 따라 다양한 방법으로 사용할 수 있는 여지가 있다. 그런 틈새에서 분위기를 달리할 수 있는 용어를 사용하여 뉘앙스를 달리 하는 것은 시인의 능력이다. 물론 같은 용어를 반복하여 음악적 리듬감을 살려내기도 하지만 그것은 다른 기법상의 문제다. 한 번 사용한 은유를 다시 사용하면 죽은 은유로서 참신한 맛이 없듯 시어도 마찬가지다. 같은 의미를 지닌 용어를 변칙적으로 사용하여 색다른 맛을 창조하려는 것은 시인의 본능적인 표현법이다.
휘뚜루마뚜루 편리했던 ‘처럼’
실밥인 중 모르고 버젓이 내걸었던 ‘처럼’
앞 문장과 뒷말의 솔기에 불과했던 ‘듯’
보충 설명 외에 아무것도 아니었던 ‘듯’
간결의 깊이와 멋 가로막았던 ‘양’
옳다구나 적당히 들앉혔던 ‘양’
싸구려 장식이라고 아무도 가르쳐 주지 않았던 ‘같이’
하마터면 평생토록 애용했을 ‘같이’
더부살이 기생식물 ‘만큼’
군더더기 군소리 ‘만큼’
어린 날에 기뻤던 사탕, 젊은 날에 고왔던 비즈/스팽글
실밥 솔기 숨기는 데 걸린 일월이야 아! 하 세월
그저 담담히, 그저 묵묵히, 그저 외로이
여절여차여탁여마 如切如磋如琢如磨
- 「나의 작시창(作詩窓)」전문
이 시는 직유법을 남발하던 시정의 자기반성이자 독자에게 주는 시론이다. 시적 기교에서 비유법은 떼어낼 수 없는 기교인데 초보시절에는 아무래도 직유법을 많이 사용한다. 그러나 시의 깊이를 알고 나면 직유보다 은유가 더 시적이고 폭넓은 비유임을 깨닫는다.
그 상황을 정 시인은 “어린 날에 기뻤던 사탕, 젊은 날에 고왔던 비즈/스팽글”로 압축 제시한다. 비즈(beads)나 스팽글(spangle)은 화려하게 보이도록 장식하는 유리구슬과 플라스틱 조각을 일컫는데 그런 장식품처럼 직유법을 좋아했던 것은 어린 시절이었다는 고백이다. 물론 이면에는 이제야 알고 보니 직유보다 은유나 상징 등의 기법이 훨씬 좋다는 것을 지적한 내용이다.
정 시인이 제시한 ‘처럼, 듯, 양, 같이, 만큼’은 직유법에 필요한 조사와 의존명사다. 이 문장에서 직유적 조사와 의존명사를 빼버리면 은유의 문장으로 바뀐다. 여기에 호수를 대입하면 ‘내 마음은 호수처럼’ ‘내 마음은 호수인 듯’ ‘내 마음은 호수인 양’ ‘내 마음은 호수같이’ 내 마음은 호수만큼‘의 문장이다. 이렇게 직유법으로 제시한 주어 뒤에는 반드시 하나의 개념을 지닌 서술어가 와야 한다. 즉 ‘호수처럼 맑다, 깊다, 잔잔하다, 고요하다’ 등으로 맺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내 마음은 호수’라고 제시하면 그것으로 완전한 문장이면서 호수가 지닌 성격 모두를 포괄한다. 그러므로 직유법이 1:1의 개념이라면 은유법은 1:多의 포괄적인 개념임을 제시한 시론이자 시학이다. 그래서 “그저 담담히, 그저 묵묵히, 그저 외로이/ 여절여차여탁여마(如切如磋如琢如磨)”해야 한다고 부연했다. 눈여겨 볼 것은 시인의 자세다. 짧은 시의 절차탁마(切磋琢磨)로는 부족하게 여겼는지 한 자 한 자에 목탁을 두드리며 수행하듯 “여절여차여탁여마(如切如磋如琢如磨)”라 했다. 시 쓰는 작업이 단순한 것이 아니라 수도승이 수도하듯 마음을 가다듬어야 하는 숭고한 작업으로 인식한 것이다.
「나의 작시전(作詩戰)」에서는 시 쓰는 작업을 전투에 빗대어 “시인에게 시는 여벌이 아닌/놓으면 죽을 수밖에 없는 들숨이며 자양이며 밧줄이다”라고 투쟁적인 자세를 보이더니 “일필휘지 원치 않는다”면서 ‘다작’을 고집하지 않겠다고 했다. 전술한 「나의 작시욕(作詩欲)」에서 나무늘보가 나무에서 사는 이유와 비슷한 진술이다. 그러면서 “한 편을 포획하는 데 평생을 기울인들 어떠리/ 그놈이 바로 하늘을 업은 그놈이라면”이라고 자신의 시가 그렇게 신중한 시간과의 싸움에서 얻은 작품임을 간접적으로 드러냈다. 시인에게 시 한 편은 목숨일 수도 있다는 상징이자 각오인 것이다.
한국인은 술(術)을 좋아하고 일본인은 도(道)를 좋아한다. 칼을 다루는 솜씨를 우리는 검술이라 하는데 비해 일본인은 검도라 하는 것이 대표적인 예다. 일본인은 모든 것을 정신적 수련의 한 과정으로 보아 도(道)라 하여 붓글씨 쓰기도 서도(書道)라 한다. 중국이 서법(書法), 한국에서는 서예(書藝)라 한 것과 대조를 이룬다. 심지어 차 마시는 것조차 다도(茶道)라 하여 격식을 강조한다. 그렇다면 글쓰기는 무엇이라 해야 하는가?
글쓰기는 붓글씨 쓰기와는 달리 어느 단계가 없다. 구양수의 다독(多讀) 다작(多作) 다상량(多商量)이 좋은 글 쓰는 비법이라 했을 뿐, 그 단계는 없다. 그런데 정숙자 시인은 시를 짓는 행위를 정신적 작업에 비유하여 작시도(作詩道)라 했다. 시 쓰는 작업은 도(道)의 경지에 이르러야한 한다는 주장이다. 그렇게 제목으로 「나의 작시도(作詩道)」라 하고 구체적으로 평범한 시는 치명적이니 차라리 안 쓰는 게 낫다고 독자에게 조연(?)한다. 그런 정도의 단계에 이른 상태가 바로 도(道)의 단계에 이르렀음을 표방한 시인 것이다.
평범은 치명적이지
평범할 바에야 안 쓰는 게 나을지 몰라
발은 현실에 머리는 공중에 매달지 않았어? 하느님께서
그 속에 깃털을 넣어 두지 않았는가 말야
평범의 뒤쪽 혹은 옆쪽을 보기 위해
사물 아닌, 사물이 지닌 원자를 찾기 위해 지새워야 해
더 분석할 수 없을 때까지
쪼개야만 해
……중략……
그렇지만 괜찮을 거야 평범보다는
평범보다 못하면 어때 아무튼
꿈속에선가 전생에선가 비밀스런 원자 만났을 때
나는 외쳤어 “심봤다!” 이렇게 말이야
-「나의 작시도(作詩道)」부분
평범한 시를 쓰지 않기 위해서 “사물 아닌, 사물이 지닌 원자를 찾기 위해 지새워야 해”라고 시상을 찾는 작업을 원자를 찾는 일에 비유했다. 그렇게 시상이나 한 편의 시(원자)를 찾기 위해 시적 대상을 “더 분석할 수 없을 때까지/쪼개야만” 한다고 다짐한다. 그래서 최후의 순간에 심마니들이 고생 끝에 산삼을 발견한 “심봤다!”는 고함으로 기쁨을 표출하듯 시도 그렇게 산삼을 탐사하듯 써야한다고 제안한다. 시 쓰기가 이렇게 처절한 작업이라면 누가 감히 시를 쓰겠다고 덤빌 것인가? 그래도 문단이 그런 분위기라면 저절로 정화되어 함량 미달의 시는 사라질 것이라는 예언을 겸한다. “평범은 치명적이지” 이 한 구절은 감히 시를 우습게 아는 자들에 대한 경고이자자정능력을 회복하라는 문단에의 요구다.
그런 수준에 도달한 자의 시 쓰기, 평밤한 수준의 시를 쓰지 않기 위해 노력하는 자세로 시를 쓴다는 의미에서 「나의 작시도(作詩道)」라 한 것이다.
시간 넉넉하던 날 나는 진짜로 시인이었다. 그리움 기다림
도 간절했었지. 급할 것 조금도 없이 졸다 깨다 독서도 하고,
사소한 것에 마음 붙이며
조금은 쓸쓸키도 했어. 남들이 상 탈 때 박수 치면서 나도
저렇게 되어봤으면, 상장 한 번 안아 봤으면 잔물결 끼어들
었다고나 할까.
“꼭 작품만이 기준이었던 것은 아니다.” 심사평 발표될 때
는 왜 ‘작품만 기준’일 수는 없는 것일까 궁금증도 컸다오.
그렇지만 알아들었어. 운영이란 맥(脈)이란 그런 걸 거라
고, 그게 정석일 거라고
네가 참으로 원하는 게 뭣이냐. 시냐? 명예냐? 성공이냐?
아냐 아냐 이제는 그보다 더 큰 걸 원해. 바람으로 되는 거라면
굴레 없는 차원을 원해. 쌓인 책 읽을 시간을, 밀린 편지
띄울 시간을, 하늘 바람 그리고 구름과도 말할 수 있는 시간
을. 그렇게 푸진 공기를 원해.
-「나의 작시운(作詩運)」전문
개인은 물론 문단의 자정능력을 촉구한 목소리는 「나의 작시운(作詩運)」에서 구체적으로 나타냈다. 요즈음의 문단을 끼리끼리의 문학이라고 핀잔하는 사회적 지탄을 그대로 반영한 시다. 숱하게 이어지는 시상식장에서 벌어진 일들을 독백으로 처리하여 가십(gossip)성 촌평이라 해도 좋은 작품이다. 맥(脈)을 중시하는 사회, 그 맥은 백그라운드([back ground]로서 속칭 ‘백’의 된 발음과 같은 용어다. 인맥, 지맥, 학맥 등 견고한 산맥을 이룬 이 맥은 사회를 온정주의에 빠지게 하여 정확한 사무처리를 방해한다. 그 맥에 의한 온정주의가 사회의 발전을 해치는 고질병이라는 것쯤은 누구나 인정하면서도 쉽게 헤어나지 못하고 오히려 금권주의로까지 발전한다. 그런 상황 속에서 순진한 사람은 행여 수상의 기회가 올지 그 기다림의 상황을 “그리움 기다림도 간절했었지.”로 고백하다가 명단에서 빠진 자신을 보고 “급할 것 조금도 없이 졸다 깨다 독서도 하고 사소한 것에 마음 붙이며//조금은 쓸쓸키도 했어. 남들이 상 탈 때 박수 치면서 자도 저렇게 되어봤으면 상장 한 번 안아 봤으면 잔물결 끼어들었다고나 할까”라고 은근한 심정을 토로한다. 얼마나 쓸쓸한 상황이었을까? 그러나 더 직접적이며 구체적인 상황은 3연과 4연에 있다.
“꼭 작품만이 기준이었던 것은 아니다. 심사평 발표될 때 왜 ‘작품만 기준’일 수는 없는 것일까 궁금증도 컸다오.// 그렇지만 알아들었어. 운영이란 맥(脈)이란 그런 걸 거라고, 그게 정석일 거라고”
수상작을 선정하는 데 왜 작품만이 기준이 아니었을까? 그 궁금증을 운명에 돌리다가도 맥(脈)에 의한 현상이라며 그것이 정석이라고 자위하는 상황은 절망의 역설이다. 그러면서 시인으로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시냐? 명예냐? 성공이냐?”라고 또박또박 강조하여 반문한 것은 모든 것을 초월하고 싶다는 심정의 토로다. “그 보다 더 큰 것을 원”한다는 시구에 모든 것을 내포했지만 마지막 연에서는 그 바람을 구체적으로 진술했다. “굴레 없는 차원을 원해. 쌓인 책 읽을 시간을, 밀린 편지 띄울 시간을, 하늘 바람 그리고 구름과도 말할 수 있는 시간을. 그렇게 푸진 공기를 원해.”
시인으로서 이보다 더 큰 즐거움을 어디서 찾을 것인가? 이미 「나의 작시학(作詩學)」에서 밝혔듯 “봉투 하나 만들면 봉투 하나만큼의 성취”를 이루고 “편지 한 통 부치면 편지 한 통만큼의 소통”을 이루며 따뜻한 관계를 맺어 살 수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네 귀의 합 360°짜리/햇빛 담을 봉투” 만들며 그 봉투에 담을 글을 쓰기 위해 “하늘 바람 그리고 구름과도 말할 수 있는 시간을, 그렇게 푸진 공기” 속에서 “쌓인 책 읽을 시간을, 밀린 편지 띄울 시간을” 즐기는 것으로 굴레 없는 차원의 세상을 살겠다고 다짐한다. 결국 글쓰기는 ‘성공’이나 ‘명예’의 도구가 아니라 글 쓰는 과정이 자연과 벗하며 안빈낙도적 생활의 멋에 취할 수 있는 것이 최고의 가치라는 목표 설정인 것이다.
시를 통해 안빈낙도를 추구하는 삶을 추구하겠다고 했지만 그 구체적인 방법은 제시하지 않았다 그러나 '시인은 모든 것을 시로 말한다.'는 의미를 증명하듯 정숙자 시인은 그 답을 「나의 작시몽(作詩夢)」에 밝혀 놓았다.
선택한 길은 늘 외롭고 멀다
시 향해 기도하고 시를 위해 걷는다
하루의 첫 시간과 마지막 시간
자투리 시간도 거기 바친다
시로 인해 천국을 알며 미혹에도 빠진다
영혼을 앓게 하고 자라게 하는
시 안에서 나는 수녀다
세상 일 몰라도 그뿐
주어진 만큼 허기지고 빈 만큼 꿈꾼다
시는, 내 신앙이며 궁극이다
- 「나의 작시몽(作詩夢)」전문
사족이 필요 없는 구체적인 답이다. 시 안에서 수녀가 될 만큼의 경건한 시간을 바치는 시인, 그래서 “시는, 내 신앙이며 궁극이다”이라고 선언했다. 그 선언은 『뿌리 깊은 달』을 통해 실증했고, 산문집『행복음자리표』에서 쓴 글을 다시 다듬으며 완성작을 만드느라 오랜 세월을 새벽 3시 이전에 잠들지 못했다는 진술로 고백했다. 시 쓰는 것이 어찌 꿈이 될 수 있을 것인가? 그러나 그렇게 글을 쓰면서 꿈 같은 세월을 보냈다는 간접적인 고백일 수도 있어 잠을 설치는 고행길이 행복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최신판 국어사전이 선물로 왔다. 조용한 시간을 틈타 나는
사전과 상견례를 가졌다. 투명 비닐로 책가위하고, 손글씨
로 된 주소와 바코드, 등기우편 요금표 등을 오려 뒤표지 안
쪽에 붙였다. 우연히 눈에 띤 낱말 ‘능선’과 인사도 했다. 그
리고 맨 앞 속지에 “내 사전에 <대충>이란 없다"고 쓰고 ‘대
충’에 빨간 줄을 그었다. 자를 대고 정확히 가뒀다. (예전에
는 아예 종이를 대고 풀칠해 버렸지만)
대충? ① 어림잡아 ¶대충 스무 명 가량 올 것이다.
② 건성으로. 대강. ¶시간이 없어서 대충 치웠다. 본딧말: 대
총(大總)
내 사전에서 대충을 없애는 일쯤 간단하다, 대충은 입도
뻥긋 못하고 쫓겨났다. 그런데 앙갚음하면 어쩐다? 언젠가
나를 대충 죽이거나 대충 묻거나 대충 태운다면…… 아아아
아 용서해다오. 미안하다. 사랑한다. 원고지 바깥에선 친하
잖니! 이렇게 주인공으로도 모셨잖니. 이해해 줘 제발. 그리
고 넌 알아 둬야 해. 빨간 오랏줄로 단단히 묶여 있다는 거 잊
어선 안 돼. 꼼짝 못할 거야 영원히, -괜찮지?
-「나의 작시애(作詩愛)」전문
작시(作詩) 시리즈의 마지막을 장식한 시다. 나폴레옹의 “내 사전에 불가능은 없다”는 말은 어쩐지 군사용어와 같은 느낌을 주는데 비해 “내 사전에서 대충을 없애는 일쯤 간단하다”고 선언한 정숙자 시인의 말은 보다 더 인간적인 맛이 난다. 이 말이 한문이라면, 영어라면, 아니 프랑스어라면, 우리말로 번역하는 과정에서 멋진 용어로 변신하여 문인들의 경구(警句)로 재탄생했을 텐데…….
나폴레옹이 Lemarois 장군에게 보낸 편지의 원문에는 “불가능이란 글자는 어리석은 자들의 사전에만 존재한다.” 또는 “불가능이란 프랑스인답지 않다. 프랑스식이 아니다”라는 문구였는데 그것을 영어로 ‘The word impossible is not in my dictionary’ 로 번역하는 바람에 세계인의 뇌리에 지워지지 않는 명구로 변했다. 그래도 얼마나 멋진 말인가. “내 사전에서 대충을 없애는 일쯤 간단하다” 나폴레옹을 능가하는 경쾌한 결단이다.
C. D.루이스는 이미지를 “독자의 상상력에 호소하는 방법으로 시인의 상상력에 의해 그려진 언어의 그림”이라 하여 시에서 이미지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지적했다. 이미지를 동원한 시의 세계는 그림일 수도 있고 맛깔스런 이야기일 수도 있는 무한상상의 세계를 전개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이미지는 시의 영역을 넓히는 데 없어서는 안 되는 중요한 요소다. 그러나 정숙자 시인은 그렇게 많은 이미지를 동원하지 않았다. 전술한 바와 같이 시를 중시하는 시작(詩作)으로서의 담론(談論)보다 시를 쓰는 행위를 중시한 작시(作詩)로서의 시론이기 때문에 굳이 이미지를 동원하지 않아도 짧은 시로 긴 설명문을 압도하는 실험적 시를 선보인 것이다. 한 두 편의 시를 위와 같은 방법으로 썼다면 실험적 시라 할 수는 없지만, 『김제문학』에 발표한 시 외에 『뿌리 깊은 달』의 시들이 상상수가 긴 설명이필요한 상황을 압축하여 독자를 쉽게 시의 세계로 끌어들인다.
「나의 작시창(作詩窓)」의 문두(文頭)로 제시한 『채근담』의 한 구절은 위 내용을 뒷받침한다. “문장을 주도(做到)하여 궁극에 이르면 다른 기교가 없고 다만 알맞을 뿐이다.”
구양수가 제시한 글쓰기 훈련 중 정숙자 시인은 다독에 무게를 두었다. 「나의 작시기(作詩記)」의 문두에 조선시대 최고의 독서광으로 알려진 백곡 김득신(1604~1684)의 명언을 실었기 때문이다.
“시를 아는 사람은 시로 사람을 취택하고, 시를 모르는 사람은 명성으로 시를 취택한다.”
김득신은 진주성 전투의 명장 김시민 장군의 손자인데 독수기(讀數記: 어떤 책을 몇 번 읽었는지를 기록한 수첩)에 『백이전』은 1억 1만 3천 번(11만 3천 번이라는 기록도 있음) 읽은 것을 비롯하여 『노자전』은 2만 번을 읽은 독서광이다. 특히 말미에 『장자』, 『사기』, 『한서』, 『중용』, 『대학』 등은 만 번을 읽지 못해 독수기에 싣지 않았다고 밝힐 만큼 자신의 독서 내력을 밝혀 후손들을 경계(警戒)했다. 59세에 과거에 급제했으니 명석하지 못한 두뇌를 다독으로 보완하여 ‘대기만성’의 진의를 실천한 사람이다.
백곡의 문장을 문두에 올린 의미는 시를 잘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시인의 명성에 가려 무조건 좋다고 하는 허위를 경계하는 의도도 담겨 있다. 공자는 『논어』 ‘양화편’에서 아들 백어에게 “시를 배우지 않으면 그 사람은 마치 담벽을 마주보고 선 것과 같다”고 가르쳤다. 시는 곧 삶의 등불과 같다는 의미이니 예나 지금이나 시는 인간의 삶을 윤택하게 하는 도구다. 세상 사람들은 시를 읽는 독자보다 시인이 많은 데다 시가 너무 어려워 읽고 싶지 않다고 핀잔한다. 모두가 우리 스스로의 책임이라 실감하는 마당에 시는 어떻게 써야 하며 어떤 자세로 대해야 하는지 지침서와 같은 시를 읽어 가슴이 후련하다. 모국어가 주는 자유와 편의성에 빠져 세속화되어가는 언어를 갈고 닦기 위하여 날밤 새우며 오랜 세월 고행을 자처하는 정숙자 시인의 노고에 감사한다. 산문집을 통해 느낀 언어의 정화와 아름다운 말, 시의 적절한 신조어를 생산하는 조탁술은 가히 언어의 연금술사라 할 만큼 좋은 열매를 맺었다. 정 시인 자신의 보람과 기쁨이지만 그로 인해 곱고 아름다운 언어를 대하는 독자에게도 큰 기쁨이다.
이 평을 쓰는 동안 마른장마가 그쳐 저수지에 물을 충분히 담았단다. 그래서 타들어가는 농작물이 해갈하여 삽을 든 농부들이 비를 맞으며 즐거워하는 화면이 마음 훈훈하게 한다. 농부들이 그렇게 빗방울에 웃음을 되찾듯, 정숙자 시인으로 하여 우리 문단에도 좋은 시, 좋은 글들이 쏟아져 나와 독자들이 더 환하게 웃을 수 있는 날이 오리라 확신한다. 그간의 언어 순화 및 정화에 애쓰며 작품을 쓰신 노고에 박수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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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형산 천수재에서
샘물 강기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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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기옥 평론집 2『느림의 계단에서 읽는 시』에 수록/ 2018. 12. 26. <가온>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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