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시집 · 뿌리 깊은 달

나의 작시욕(作詩慾)/ 정숙자

검지 정숙자 2013. 11. 18. 22:01

 

 

       나의 작시욕(作詩慾)

 

      정숙자

 

 

   한 편의 시가 한 번의 기회다

   그 한 번의 실패를 두려워한다

   그 한 번의 빨강, 그 한 겹의 주황, 그 한 칸의 노랑 초록

파랑 쪽빛 보랏빛의 박자와 음을

 

   지금 쓰는 이 한 편에 미래가 달린다

   지금 쓰는 이 한 편에 과거도 변한다

   지금 쓰는 이 한 편에 오늘이 뚫린다

 

   현관문 박차고 나갈 것인가, ―아암

   필히 만날 것인가, ―좋아

   홀소리 닿소리 속에, 찍으려다 만 부호들 속에, 나 자신의

관 속에 들어갈 종결어미는 오직 한 편의 시뿐이므로

 

   외출/만남 그 날갯짓도 한 줄의 언어

   좌초와 우울마저도 남쪽에서 불어온 한 마디 가락

   시로 인한 일거수일투족 일초일순은 그 모두가 한 틈서

리 시

 

   한 편의 시는 한 쾌의 기도, 한 편의 시는 한 척의 열정, 한

편의 시는 한 떼의 욕망, 한 편의 시는 한 채의 분노, 한 편

의 시는 한 섬의 고뇌, 한 편의 시는 한 길의 운명, 한 편의

시는 한 생의 숙명, 한 편의 시는 한 올의 기적, 한 편의 시

는 한 필의 축복……

 

   모골이 송연하다. 한 행, 한 음보, 한 음절에 목을 맡긴다.

그렇게 나는 쉰여섯에 왔다. 예순 쪽으로도 그렇게 나아가리

라. 나무늘보 걸음이지만, 사실 나무늘보는 나무를 사랑하

기에, 나무에서 떨어지지 않으려고, 신중을 기하느라 그리

웃기며 눈감았던 것. 죽음만이 어느 날 나무늘보를 나무에서

떼어 놓을 수 있을 거라고. 죽음만이 어느 날 나무늘보를 나

무에서 내려놓을 수 있을 거라고

   -『현대시』2007년 5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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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집『뿌리 깊은 달』에서/ 2013. 2. 28. <(주)천년의시작> 펴냄

  * 정숙자/ 1952년 전북 김제 출생, 1988년 『문학정신』으로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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