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작시욕(作詩慾)
정숙자
한 편의 시가 한 번의 기회다
그 한 번의 실패를 두려워한다
그 한 번의 빨강, 그 한 겹의 주황, 그 한 칸의 노랑 초록
파랑 쪽빛 보랏빛의 박자와 음을
지금 쓰는 이 한 편에 미래가 달린다
지금 쓰는 이 한 편에 과거도 변한다
지금 쓰는 이 한 편에 오늘이 뚫린다
현관문 박차고 나갈 것인가, ―아암
필히 만날 것인가, ―좋아
홀소리 닿소리 속에, 찍으려다 만 부호들 속에, 나 자신의
관 속에 들어갈 종결어미는 오직 한 편의 시뿐이므로
외출/만남 그 날갯짓도 한 줄의 언어
좌초와 우울마저도 남쪽에서 불어온 한 마디 가락
시로 인한 일거수일투족 일초일순은 그 모두가 한 틈서
리 시
한 편의 시는 한 쾌의 기도, 한 편의 시는 한 척의 열정, 한
편의 시는 한 떼의 욕망, 한 편의 시는 한 채의 분노, 한 편
의 시는 한 섬의 고뇌, 한 편의 시는 한 길의 운명, 한 편의
시는 한 생의 숙명, 한 편의 시는 한 올의 기적, 한 편의 시
는 한 필의 축복……
모골이 송연하다. 한 행, 한 음보, 한 음절에 목을 맡긴다.
그렇게 나는 쉰여섯에 왔다. 예순 쪽으로도 그렇게 나아가리
라. 나무늘보 걸음이지만, 사실 나무늘보는 나무를 사랑하
기에, 나무에서 떨어지지 않으려고, 신중을 기하느라 그리
웃기며 눈감았던 것. 죽음만이 어느 날 나무늘보를 나무에서
떼어 놓을 수 있을 거라고. 죽음만이 어느 날 나무늘보를 나
무에서 내려놓을 수 있을 거라고
-『현대시』2007년 5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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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집『뿌리 깊은 달』에서/ 2013. 2. 28. <(주)천년의시작> 펴냄
* 정숙자/ 1952년 전북 김제 출생, 1988년 『문학정신』으로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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