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슬 프로젝트-5
정숙자
풍화비(風化碑)에 대한 주석// 널린 말이 태산인데도 아직 태어나지
않은 말이 짚인다. 문장에 들이고자 했으나 찾지 못한 말. 그 <없는 말>은
긴히 필요한 자가 만들어 쓸 수밖에 없는 일이다.
천지간에 고인은 많고 비석과 비문 또한 부지기수다. 그 가운데 오랜 세
월 비바람에 깎이고 씻겨 한 글자도 남아있지 않은 비석이 존재하련만, 그
빗돌을 일컫는 이름이 없어 ‘풍화비’라 짓는다.
‘백비’와 ‘몰자비’가 있으나 백비는 아직 글을 새기지 않은 비요, 몰자비
또한 백비와 근사한 뜻인 데다가 “겉모습은 멀쩡하면서 글을 모르는 사람
을 조롱하여 이르는 말”이라 하니 그 아니 먼가.
산 사람은 삶에 쫓기고, 간 사람은 죽음에 열중하므로 비석은 저 홀로 바
람을 따라간다. 한 생애가 아스라이 하늘에 들 때, 보이지 않는 등불이 앞
을 비출 때, 강 건넌 고독이 더딘 꽃을 올릴 때.
* <시사사> 2014.3-4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