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한 편>
그들의 묘지에서
김미옥/ 문예비평가
작년 만주 여행길에 윤동주의 묘지를 찾는 일정이 있었다. 그난 나는 무슨 일로 일행을 놓치고 혼자 걸어야 했다. 앞을 분간할 수 없는 눈보라로 길을 잃어버렸다. 바람이 울음소리를 냈는데 장년의 남자들이 내는 곡소리였다. 다행히 나를 찾으러 온 일행이 있어 나는 무사히 그의 묘에 닿을 수 있었다. 그러나 내가 찾았던 것은 바로 옆 송몽규의 묘였다.
윤동주와 송몽규는 중국 길림성의 명동촌에서 같은 해 한 집에서 태어나 같이 자랐다. 같은 학교를 다녔고 같은 죄목으로 재판을 받아 같은 감옥에서 19일 간격으로 옥사했다. 문익환의 『윤동주 평전』에 의하면 동주는 몽규에게 항상 열등감을 느꼈다고 한다. 그는 어릴 때부터 성격이 활달했고 뛰어난 문학적 재능이 있었다. 나는 윤동주를 설명할 때 같이 언급되는 송몽규에 더 눈길이 갔다. 송몽규는 1934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콩트 「숟가락」으로 등단했다. 그때 그의 나이는 17살이었다. 당시 문학 등단은 중앙일간지를 통해야만 했기 때문에 동주에게 상당한 자극이었을 것이다. (p. 200-201)
그의 당선작은 오 헨리의 「크리스마스 선물」을 연상케한다. 가난한 부부가 쌀이 떨어지자 아끼던 은수저를 팔았다. 수저는 장인이 그들에게 준 결혼 선물이었다. 밥상을 앞에 놓고 아내가 눈물을 흘리는데 영문을 모르는 남편은 뒤늦게야 그녀의 수저가 없다는 걸 깨닫는다. 나는 「숟가락」을 읽으면서 호탕하고 유머가 뛰어난 송몽규를 상상했다.
등단한 이듬해 송몽규는 갑자기 학교를 자퇴하고 가출해서 상해임시정부로 떠났다. 임정에서 한국광복군의 장교 양성반 교육을 받다가 일본 경찰에 발각되었으나 나이가 어려 검시의 불기소처분을 받았다. 그러나 그때부터 그는 고등계 형사들의 밀착 감시 대상이 되었다. 다시 고향으로 돌아와 학업을 재개했는데 옆길로 빠진 시간이 있었음에도 동주와 함께 연희전문학교에 합격했다.
송몽규의 아버지는 윤동주의 고모부였다. 윤씨 집안의 부드러운 성품과는 달리 그는 대단한 웅변가였던 것 같다. 몽규는 12살의 나이에도 아버지를 따라다니며 연설을 했는데 어른들 앞에서도 결코 기죽는 일이 없었다고 했다. 그는 생각하며 실천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연희전문학교에서도 문예부장으로 활동하며 1938년 8월 조선일보에 시 「밤」을 발표했다. 이미 작가로 활동하는 그를 보며 동주는 무엇을 느꼈을까? 같은 문학을 하지만 앞서가는 이는 있게 마련이다. (p. 201-202)
고요히 沈澱(침전)된 어둠
만지울 듯 무거웁고
밤은 바다보다 깊구나
홀로 밤 헤아리는 이 맘은
험한 山길을 걷고
나의 꿈은 밤보다 깊어
호수군한 물소리를 뒤로
멀 리 별을 쳐다 쉬파람 분다
-송몽규, 시 「밤」 전문
연희전문학교를 차석으로 졸업한 몽규는 교토제국대학 문학부 사학과 선발시험에도 합격했다. 동주는 이 시험에 낙방하고 다른 대학에 들어갔다가 이듬해 다시 교토에 있는 도시샤 대학에 입학하여 몽규를 만날 수 있었다. 성장기에 누구에게나 있는 도시샤 대학에 입학하여 몽규를 만날 수 있었다. 성장기에 누구에게나 멘토가 되는 친구가 있다. 나는 송몽규가 윤동주의 멘토가 아니었던가 생각한다. 그는 교토로 오기 위해 세 번의 대학 시험을 치렀는데 거기 송몽규가 있었다.
두 사람은 1943년 7월 10일, "재경도在京都 조선인학생 민족주의 그룹사건"으로 체포되었다. 이들은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나란히 징역 2년 형을 받았다.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함께 옥고를 치르다가 1945년 2월 16일 윤동주가 먼저 세상을 떠났고 곧이어 송몽규도 사망했다. 그때 이들의 나이는 28살이었다. (p. 202-203)
항상 윤동주의 뒤에는 송몽규가 있었다
윤동주의 앞에는 송몽규가 있었다
송몽규는 윤동주의 그림자가 되어 있었다
무슨 일을 하든 윤동주의 조용한 얼굴에는 송몽규가 있었다
송몽규는 독립군에 들어가 있을 때도 그의 그림자는 남겨놓고 떠났다
학교는 그럭저럭 윤동주와 맞먹었어도 생각하는 것, 그것을 옮기는 것은 송몽규였다
실천자, 그는 혼자 돌아다니는 윤동주를 나무라지않았다
윤동주가 시를 쓰는 일이
얼마나 보람된 일인가를 설명하지 않아도 알고 있었다
-이탄, 시 「송몽규」 부분 (시집 『윤동주의 빛』)
동주의 오촌 윤영춘이 사망 소식을 듣고 시신을 거두러 와서 살아있던 송몽규를 면회했다. 그때 그는 무슨 주사인지 모르지만, 동주와 같이 계속 주사를 맞고 있다고 했다. 일본 학자 고노오 에이치도 그가 혈액 대체 실험 대상자였다는 글을 쓴 적이 있다. 일본의 시인 이바라기 노리코도 윤동주를 좋아해서 그의 생애를 추적하고 죽음이 형무소에서 맞은 정체 모를 주사 때문이라고 밝혔다. 죽음의 원인이 생체실험이었다는 주장은 상당한 파장을 일으켰다.
그리고 그도 19일 후 세상을 떠났다. 그의 아버지는 일본의 화장장에서 바닥에 튄 뼛가루도 모두 담아왔다고 했다. 그때 아버지 송창희의 나이는 54세였다. 그는 아버지를 탁한 아들이었다. 그의 분노와 슬픔이 어떠했을지 눈에 보이는 것 같다. 송몽규의 묘지는 명동 장재촌 뒷산에 묻혔다가 1990년에 용정의 윤동주 묘지 옆으로 이장했다. 윤동주의 비문은 <시인 윤동주 지묘>이고 송몽규의 비문은 <청년문사 송몽규 지묘>이다.
사람들이 윤동주의 묘에 모여있을 때 나는 송몽규의 묘에 술을 따랐다. 그가 세상에 남긴 글은 시 두 편과 콩트 한 편이다. 그도 러시아의 시인 만델슈탐처럼 자기 원고에 무관심했던 것 같다. 시인에겐 남편의 시를 암기하고 필사하던 아내가 있었다.
내가 벌판에서 들었던 장년이 울음소리는 그의 아버지였던가.
나는 그가 쓰고 잃어버린 글들이 궁금해졌다. ▩ (p. 203-205)
* 블로그 註: 아래 설명된 사진은 책에서 일독 要
· 201쪽 상단 左-중국 만주 용정시 동간교회/ 묘지공원에 있는 윤동주 시인의 묘
· 々 쪽 상단 右-윤동주 시인의 묘 옆에 있는
· 々 쪽 청년문사 송몽규의 묘
· 202쪽 상단 左-송몽규(1917~1945)
· 々 쪽 상단 友-윤동주(1917~1945)
· 204쪽 상단 - 일본 유학 첫해인 1942년 여름에 방학을 맞아 귀국한 송몽규와 윤동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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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학 사학 철학』 2024-가을(78)호 <인플루언서의 현장>에서
* 김미옥/ 문예비평가, 공저『내가 검찰을 떠난 이유』, ⟪문학뉴스⟫ '김미옥의 종횡무진' 고정 연재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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