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안의 절집
홍신선
이 가을 찬비에 온몸 쫄딱 젖은 늙은 고양이가
절집 처마 끝에 은신해 그 비를 긋고 있다.
명부전 뒤 으늑한 땅이 생판 모를
한 포기 민들레를 가부좌 튼 무릎 위에 앉히고
서로 체온을 나누며 서로의 온기로 시간을 말리며
화엄 하나 이룬 것을
또 그 옆에는 고목이 고색창연한 제 슬하를 비워
담쟁이덩굴 두어 가닥 거둬 양육하는 것을
내 안의 어딘가 그런 절집 하나 찬바람머리 부슬비 속 그런 그린 듯 앉았다.
이건 내 세월도 아닌데 적막을 착취하는 이 비는 언제 그칠 것인가
속울음 삼킨 고양이마냥.
-전문-
▶미루나무가 바람에 몸을 맡기는 집/ 홍신선 시인의 '오류헌五柳軒' (부분)_김밝은/ 시인
대문 앞에 '운보 문학의 집'이라 새겨진 표지석으로 시인의 집이라는 걸 짐작할 수 있었는데, 마당에 들어서자 잘 관리해 놓은 잔디밭 저편에 미루나무가 어서 오라는 듯 바람에 제 몸을 맡기며 서 있었다. 어디서 바람이 부는지, 미루나무 다섯 그루가 한 방향으로 몸을 낮추며 흔들리는 모습이라니, 문득 바람이 지나는 마을마다 빽뺵하게 들어찼던 미루나무를 보며 경이로웠던 키르기스스탄의 풍경이 겹쳐졌다. 그런데 들판도 벌판도 아닌 마당에 미루나무가 있다니 놀라웠다. 선생님께서는 당호堂號가 오류헌五柳軒이어서 미루나무 가지 다섯 개를 가져다 심으셨는데 10여 년의 세월이 지나니 저렇듯 자랐다고 하셨다. 시간의 키가 그렇게 크다.
현관 문 위에 걸어 놓으신 당호 '梧柳軒' 아래 쓰인 글을 읽어보니 "하늘의 해 달 별 세 가닥 빛에 감응하여 年年歲歲로 인간의 다섯 가지 복을 더해갈 것이니 건축주 洪申善은 堂號를 '梧柳軒'이라 짓고 遯世의 뜻을 담다"라고 쓰여 있다. 도연명의 歸去來辭가 생각나기도 하고 "이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내 누님 같은" 시구가 생각나기도 했다. 세상의 번잡함을 뒤로 하고 고요의 시간으로 들어가고 싶으셨을까.
선생님 댁 마당에 들어서며 놀란 게 두 가지였는데 그중 하나는 마당을 빙 둘러놓아 둔 스티로폼 상자와 바람 속에 서 있는 키 큰 미루나무였다. 궁금증은 금세 해결이 됐는데 스티로폼은 개별행동을 하는 고양이들이 추운 겨울을 날 수 있도록 만든 맞춤형 집이라셨다. 요즘 말대로 선생님께서는 '캣대디'이신 것이다.
선생께서는 30여 마리의 길고양이들에게 하루 세 번 밥을 주신다셨다. 갈 곳 없는 녀석들이 소문을 듣고 시인의 집으로 찾아드는 것 같다. 우리가 머무는 동안에도 낯선 사람을 두려워하는 기색도 없이 놀이터처럼 돌아다녔다. 고양이들은 경계심이 많은 동물로 알고 있는데, 그야말로 제집인 줄 아는 모양이었다. 바깥나들이가 쉽지 않겠다고 말씀 드리니 이젠 가족 같은 사이가 되어서 나가면 고양이들이 걱정돼 더 빨리 집에 돌어오게 된다하셨다. 거기에 강아지도 세 마리나 있으니 선생님의 일상이 어떠실지 충분히 짐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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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로 한가로운 시인의 시간을 모내시기도 하고, 때론 농부로, 또 고양이를 돌보시며 바쁘게 지내시는 선생님. 김현승 선생님의 소개 아닌 소개로 만나 부부 시인의 길을 걷고 계시는 노향림 선생님과의 인연도 귀를 세우고 들었다. (p. 시 26-27/ 론 25-26 ·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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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네르바』 2023-겨울(95)호 <시인의 집/ 홍신선 편> 에서
* 홍신선/ 1944 경기 화성 출생, 1965년『시문학』으로 등단, 시집『서벽당집』『겨울섬』『삶, 거듭 살아도』(선집), 『우리 이웃 사람들』『다시 고향에서』『황사 바람 속에서』『자화상을 위하여』『우연을 점찍다』『홍신선 시 전집』『마음經』(연작시집), 『삶이 옹이』『사람이 사람에게』(선집), 『직박구리의 봄노래』, 산문집『실과 바늘의 악장』(공저), 『품안으로 날아드는 새는 잡지 않는다』『사랑이란 이름의 느티나무』『말의 결 삶의 결』『장광설과 후박나무 가족』, 저서『현실과 언어』『우리 문학의 논쟁사』『상상력과 현실』『한국 근대문학 이론의 연구』『한국시의 논리』『한국시와 불교적 상상력』
* 김밝은/ 2013년『미네르바』로 등단, 시집『술의 미학』『자작나무숲에는 우리가 모르는 문이 있다』, <미루> 동인, <빈터>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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