흰 발자국
이관묵
눈 쌓인 숲길을 걸었네
한 마리 새 발자국을 따라 걸었네
벌판 둘러메고 한없이 혼자 걸어간
흰 발자국
이별의 간격이었네
그 속도였네
한 곳에 이르러 한참을 머뭇거리다 사라진
되돌아 나간 흔적 없는
하얀 영혼
어디쯤일까
나를 오래 세워놓은 여기는
-전문-
해설> 한 문장: 지금 이곳은 여름, 열기의 감옥. 열파 속에서 읽는 겨울의 시. 눈雪이 점령한 백색 공간에서 여름의 백백白白한 햇빛 아래로 건너온다. 상상의 선을 타고 움직인다. 바다가 '나'의 몸에 상감象嵌한 흰 발자국. 그 물빛과 하늘빛 사이에 낀 구름. 몰려오는 바람과 파도의 발톱을 바라보면서 떠올린 것은 절망. '나'를 맑게 하는 눈물을 본 듯하다. 이별만큼 쉬운 것이 없다. 이별이 발기발기 찢어버린 '나'의 몸을 망각이 시침질한다. 자유로워지지 않으면 이기지 못하는 것이다. 다시 이별이 온다면? 또 이별이 다가와 내가 버려진다면, 나는 칼로 목을 베겠네, 불로 내 몸의 구멍을 채우겠네. 그 후에 형해를 빻은 가루가 되어 너를 영원한 외로움의 감옥에 처넣을 것이다. 사랑이 진정한 복수이다. 조만간 다른 이별이 찾아올 것이다. '나'는 사랑에 빠지는 '나'를 감당할 수 없기 때문에 '나'의 목을 조를 것이다. 처벌이라는 응대. '나'의 아픔보다 더 큰 아픔을 너에게, '나'의 시에게 줘야 한다. 『서향집』을 읽은 오늘은 어떻게 기록될 것인가. 오늘밤은 '나'를 어떤 곳으로 데려갈 것인가. 밤은 어디로 사라질 것인가. 너(시)는 '나'를 사랑하지 않는데, '나'는 너를 사랑한다고 믿는다. 이것을 사랑의 실패라고 기입한다. 밤이 흔들린다. 밤의 어깨 너머로 네가 나타나면, '나'는 울기 시작할 것이다. 사랑받고 싶은 욕망. 사랑받아서 따뜻해지고 싶은 마음. 그 품에 안겨 잠들고 싶은 마음. 내게 필요한 것은 그 몸이다. '나'를 빚어낸 너의 몸을 확인하고 싶다. 말할 수 없는 것, 기록할 수 없는 것. 사랑의 실패를, 다가오는 이별의 순간을, 준비한다. 시의 끝을 받아들일 수밖에······ 난파선이 되어서라도 나아갈 수밖에······ 사람아, '나'를 잊어라. 긴 시간 상념과 꿈 사이를 오가면서 어둡고 마른 '나'의 "하얀 영혼"을 봐왔다. 곧 부스러질 허수아비 같은 '나', 오늘도 이별을 준비하는 것인가, 너는. (p. 시 22/ 론 99-100) <장석원/ 시인 · 광운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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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집 『서향집』에서/ 2024. 10. 21. <서정시학> 펴냄
* 이관묵/ 1947년 충남 공주 출생, 1978년 『현대시학』으로 등단. 시집『수몰지구』 『변형의 바람』『저녁비를 만나거든』『가랑잎경』『시간의 사육』『동백에 투숙하다』『반지하』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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