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마의 전설 외 1편
황정산
단풍나무로 만든 도마가 있었다
백정 무태의 도마였다
크기와 무게와 그 견고함으로
단연 도마의 왕이었다
수많은 칼질에 피와 살이 파고들어
이것으로 모진 학대를 견딜 수 있었다
행주산성 전투에서 도마는 성벽 위에 올려져
잠시 방패가 되었다
조총 탄환이 박히고 불에 그을렸지만
아직 쓸 만한 도마는 다시 칼을 받았다
오랜 세월 후
갈라지고 부스러져 옹이 부분만 남은 도마는
고임목이 되어 창고 문틀을 받치고 있었다
한 떼의 동학군이 관아를 습격하다
석화되어 단단해진 이 목재를 발견하고
공들여 깎고 기름에 튀겨 화승대 총알을 만들었다
도마가 이제 피와 살을 파고들었다
도마는 없다
박물관에도 역사책에도
도마는 보이지 않는다
도마들은 남아 있을 이유도 방법도 없었다
이름 없는 도마들을 위해 이 기록을 남긴다
-전문(p. 62-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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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푸집의 국적
길가 공터에 거푸집이 포개져 있다
시멘트 얼룩을 지우지도 못하고
잠시 누워 쉬고 있다
거친 질감이 상그러워
아무도 눈길을 주지 않는다
흑단과 마호가니도 아니고
삼나무나 편백이 아니라 해도
그들도 이름은 있었을 것이다
와꾸나 데모도라 불리기도 하지만
응우옌이나 무함마드라 불러도 상관은 없다
어디서 왔는지 누구도 묻지 않는다
상표도 장식도 아닌 국적을
구태여 말할 이유는 없다
하지만 그들도
타이가의 차가운 하늘을 찌르거나
우림의 정글에 뿌리내려 아름드리가 되길 꿈꾸었으리라
오늘도 도시를 떠받치던 불상의 목재 하나가
비계 사이에서 떨어지고 있다
이제 국적과 이름이 밝혀질 것이다
-전문(p. 62-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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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첫 시집 『거푸집의 국적』에서/ 2024. 10. 15. <상상인> 펴냄
* 황정산/ 1958년 목포 출생, 1993년『창작과비평』으로 평론 활동 시작, 2002년『정신과표현』에 시 발표, 저서『주변에서 글쓰기』『쉽게 쓴 문학의 이해』『소수자의 시 읽기』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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