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덕동
이인원
아마 어느 초여름 저녁 무렵이었을 것이다
시멘트 바른 마당에 온 가족이 모여 있었는데 목이 늘어진 러닝셔츠 차림의 엄마는 살강에 남은 밥을 올려두고 수돗가에선 큰언니가 설거지를 막 마친 참이었다 여동생 둘이서는 공깃돌 놀이를 하고 나는 평상 한쪽 끝에 반쯤 누워 있었는데 마침 그때 시원한 바람이 불어왔고 빨랫줄에 널린 옷가지들이 이리저리 가볍게 흔들렸다
왜 유독 그 그림인지 알 수 없는, 자기부상 열차처럼 기억의 철길에서 살짝 떠오르는 한 장면이 있다 손바닥을 벗어나 다시 손바닥으로 안착하는 반질반질한 공깃돌에 숨겨졌을지도 모를 이미 예정된 궤도, 혹시 그날 신비한 磁性에 이끌려 마당을 슬쩍 빠져나온 내가 지금의 나를 한참 지켜보다 갔던 것일까
가끔 살강에 올려 둔 보리밥 생각이 나 삼덕동 그 집으로 갈 때면 삐걱대는 나무 평상에 엎드린 채 잘 마른빨래처럼 기분 좋게 흔들리다 돌아오곤 하는데 설거지를 다 끝낸 초여름 저녁 무렵이면 아무도 몰래 승차하고 싶어지는 그 열차
-전문(p. 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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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네르바』 2024. 가을(95)호 <신작시> 에서
* 이인원/ 1992년 『현대시학』으로 등단, 시집 『마음에 살을 베이다』『궁금함의 정량』『그래도 분홍색으로 질문했다』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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