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의 슬픔 외 1편
이선이
주머니에 구멍이 난 줄도 모르고 구슬을 모았습니다
모으느라 분주한 마음에 감추기만 했지 열어 보지 못했습니다
내 속에 내가 많다는 말은 거짓인 줄 모르기에 사실적인 거짓입니다
나는 내 앞에 있거나 내 곁에 있거나
멀찍이 뒷짐 지고 서서 발밑을 살피고 있을 뿐
영구 외출 중인 나를 기다리는 건
어디서 잃어버린 줄도 모르는 색색의 마음입니다
내일을 살아내느라 나는 여기에 없고
누군가의 처진 어깨를 다독이느라 나는 여기에 없고
잃어버린 감정을 줍느라 나는 여기에 없고
나의 앞과 옆과 뒤에서 나는
여기의 실종자
오늘의 부재자
없는 세상을 잃어버린 구슬처럼 굴러다닙니다
정원 가득 꽃을 심은 정원사는 잡초를 뽑느라 꽃을 놓치듯
내 안의 오늘이 잡초처럼 뽑혀 나가는
여기는 저무는 봄날입니다
손톱이 자라는 속도로 피었다 지는
내 정원의 꽃들에게도 구멍 난 오늘이 있을까요
여기로부터
여기로
구슬을 굴려 봅니다
꽃의 형편은 궁금해하지 않겠습니다
다른 세계에서 나는 꽃으로 태어나지 않겠습니다
-전문(p. 68-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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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의 극장에서
얼어붙은 연못가
저녁별 와서
서쪽 모서리 설핏 환하고
돌 틈으로 빠져나가는 물소리 듣는다
겨우 소한小寒인데
시퍼런 얼음막 뚫고 출연을 결심한 자들의 행방이여
누구의 삶에나 누수는 있다고
긴 암전 속
무대로 달려 나오는 발자국 소리
막이 오르면
강 저편에서 얼어붙은 심장 녹여 줄 전령이 오리라고
가시 많은 바람은 음향을 높이는데
리허설만 하다 막 내린
죽은 오라버니 무른 발소리에 귀가 시리고
남의 대사 잘도 훔치더니
서둘러 이번 생에서 퇴장해 버린
연극반 동기 녀석 날쌘 발소리에 눈이 아려 와
자취 잃은 물녘
찢어진 막을 기워 가며
저녁별은
올 풀린 독백을 읊조리고 있다
-전문(p. 118-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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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집 『물의 극장에서』에서/ 2024. 10. 16. <걷는사람> 펴냄
* 이선이/ 경남 진양 출생, 부산에서 성장, 1991년 『문학사상』으로 등단, 시집『서서 우는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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