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우 하는 일
김병호
우리는 아무 일 없었던 듯 기울어진 담장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중이었습니다 무릎을 끌어안고 울먹이는 여자의 맨발을 눈치챈 건 순전히 그늘 탓이었다고 당신은 말했습니다 뿌리에서 멀수록 울음이 붉다는 걸 당신은 아직 모릅니다
아무 일, 아무 마음이 없다면 함부로 그리워할 텐데, 보고도 못 본 척 도망갈 생각은 처음부터 없었던 듯 덩굴이 담장을 달립니다 당신을 닮아서 멈춰 세우고 싶었습니다 술래가 버리고 간 저 발자국들이 오늘을 닮았으면 하는 마음은, 기운 담장보다 위험합니다
언제 갚을 수 있을지 모른 채 닳고 닳아 까맣게 저를 버리는 일은 담쟁이가 겨우 하는 일이라고 당신이 말했습니다. 아무 일도 없이 어쩌지도 못해 서성이며 펄럭이며 아득하다가 다시 시드는 일이 짐승을 풀어놓고 키우는 일과 다르지 않다는 걸 당신은 끝내 모릅니다
아직 거기 있냐고 묻지 않은 일은 마음 바깥을 내어다보는 일입니다
정성스럽게 겨우 하는 최선의 일입니다
-전문(p. 30-31)
시인의 말//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발끝만 바라보고 서 있었다.
하루만 남은 마음으로
하루만 살았다.
괜찮지 않았다
-전문(p. 5)
※ (시집 표제)_ 슈게이징(Shoegazing)은 1980년대 중반 영국에서 시작된 인디 록의 한 장르. 몽환적인 사운드 질감과 극도로 내밀하고 폐쇄적인 태도가 특징. 신발(shoe)+뚫어지게 보다(gaze)의 합성어로, 관객과 소통하려는 의지 없이, 죽어라 자기 발만 내려다보면서 연주하는 무대매너 때문에 붙은 장르명이다. (p.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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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집 『슈게이징』에서/ 2024. 10. 25. <시인의일요일> 펴냄
* 김병호/ 2003년 ⟪문화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시집『달 안을 걷다』『밤새 이상을 읽다』『백핸드 발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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