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지에서 읽은 시

지나갔으나 지나가는/ 여성민

검지 정숙자 2024. 10. 7. 02:11

 

    지나갔으나 지나가는

 

     여성민

 

 

  스타벅스 이층에 앉아 시를 쓴다 여러 나라 커피를 마시면 시간은 여러 커피나무에서 따는 여러 저녁 같은데 여러 나라 구름에 손을 넣은 적 있다 손등을 지나 손목까지

 

  커다란 시계로 덮고 다닌 적 있다 거즈처럼

 

  구름 낀 한반도라고 말했다가

  복도에서 벌을 섰지

  지금은 시계를 풀었지만

 

  거즈 자국이 손목에 남아 있다

  시계를 푼 손목은 고무나 젤리같이 느껴지기도 해

  미운 애인처럼

 

  젤리는 이빨 사이에 끼고 세상은 젤리를 씹는 힘으로 가득하구나 치아 사이에서 젤리를 빼낼 때 손가락이 잠깐 참호에 들어갔던 느낌 엄마 몰래

 

  여러 저녁에 참전한 느낌

 

  언젠가 참호 밖으로 나갈 거야 소총을 맨 채 커피나무라고 우기거나 죽은 병사들의 손에서 시계를 벗기며 엎드린 자세가 될 거야

 

  지나갔으나 지나가는

  우리의 시간이

 

  지나갔으나 지나가는 물방울이

 

  손목을 버릴 때 둥근 참호에 죽은 병사 하나 떠 있는 느낌

      -전문(p. 11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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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로여는세상』 2024-봄(89호)호 <신작> 에서

  * 여성민/ 2012 ⟪서울신문⟫ 신춘문예 시 부분, 2010년 『세계의문학』 소설 부문 당선, 시집『에로틱한 찰리』, 소설집『부드러움과 해변의 신』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