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수의 글>
과학과 철학을 넘나드는 광활한 물리학 여정
이중원/ 서울시립대학교 철학과 교수
20세기의 저명한 양자 물리학자인 머리 겔만Murray Gell-Mann은 이렇게 말했다.
"양자역학은 우리 가운데 누구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지만 사용할 줄은 아는 무척 신비롭고 당혹스러운 학문이다."
리처드 파인만도 마찬가지로 "양자역학을 이해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말했다. 양자 이론은 매우 유용하지만 세계의 실재, 세계상에 대해서 말해주는 바는 이해하기 어렵고 매우 혼란스럽다는 말이다. 오늘날 양자 이론이 물리학·화학·생물학·천문학 등 현대 과학의 기초이고 컴퓨터, 레이저, 원자력과 같은 현대 기술의 유용한 토대임을 생각한다면, 이는 미스터리가 아닐 수 없다. (p. 238)
카를로 로벨리는 이 책 『나 없이는 존재하지 않는 세상』에서 양자 이론이 탄생한 지 100년이 지난 지금에도 풀리지 않고 있는 이 수수께끼에 새롭게 도전한다. 양자 이론이 세계의 실재에 대해 무엇을 말해주는지, 혹은 양자 이론이 그려내는 세계는 어떠한 모습인지를 진지하게 탐구한다. 결론부터 말하면 세계는 고정된 속성을 지닌 자립적인 실체, 즉 물질 입자들로 구성되어 있지 않고 상호 간의 작용과 상관관계를 바탕으로 한 관계의 네트워크로 이루어져 있다. (그는 이를 양자 이론에 대한 '관계론적 해석'이라고 부른다.)
로벨리의 탐구는 관찰 가능성에 기반해 양자 이론을 꽃피운 베르너 하이젠베르크의 아이디어에서 출발하지만, 그 여정의 전 과정은 놀라울 정도로 광활하고 방대하다. 과학과 철학의 영역을 경계 없이 넘나들면서 통섭적으로 사고한다. (p. 238-239)
먼저 로벨리는 양자 이론이 밝혀주는 세계의 실제 이미지와 관련해서, 이를 나름대로 강하게 제시한 기존의 관점을 비판한다. 특히 양자 세계를 고전적인 물질 파동의 세계로 본 슈뢰딩거나 봄의 관점이라든가, 양자 도약, 양자 중첩, 양자 얽힘의 기이한 현상을 이해하고자 양자 이론에 숨은 변수 또는 다세계 개념을 추가로 도입한 관점 등이 대표적이다. 이들 관점은 양자 세계의 불확정성과 불연속성 그리고 확률을 피하고자, 그 대가로 실재에 대한 고전적인 이미지를 고수하거나 결코 관찰할 수 없는 요소를 세계의 실재 이미지에 추가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로벨리는 양자 이론은 우리를 혼란스럽게 하지만, 세계의 실재를 이해하는 새로운 관점, 즉 세계의 실재에 대한 그림 또는 사물을 생각하는 개념적 틀을 새롭게 열어준다고 본다. 그에게 과학은 그 자신의 개념적 토대를 수정하고 세상을 처음부터 다시 설계할 수 있는 반항적이고 비판적인 사고의 힘이기 때문이다.
한편 로벨리는 앞의 관점과는 대척점에 서 있는 통상적인 입장, 즉 양자 이론이 관찰 가능한 것만 설명한다는 하이젠베르크의 독특한 생각과 양자 이론은 현상이 발생할 확률만을 예측한다는 보른의 주장, 그리고 아주 작은 규모의 양자 세계는 입자적이라는 관점에 기본적으로 공감한다. 하지만 세계의 실재에 대해 무관심하고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는 정통 코펜하겐 해석(양자 이론을 단순히 확률 계산의 도구로 간주)과는 전혀 다른 관찰, 확률, 입자성의 의미를 관계라는 실재를 통해 새롭게 재해석한다. (p. 239-240)
로벨리는 양자 현상에서 매우 기이한 역할을 하는 관찰(또는 관찰자)을, 의식을 지닌 인간만의 특별한 것으로 보지 않고, 자연의 과정으로서 자연법칙을 따르는 두 대상 사이의 상호작용 또는 상관관계로 본다. 의식의 형성 및 작용 또한 마찬가지다. 로벨리에게 이 세계는 끊임없는 상호작용의 촘촘한 그물망이다. 대상은 처음부터 고유한 속성을 지닌 자립적인 실체가 아니라, 다른 대상과의 상호작용 속에서 관련 속성이 끊임없이 발생하는 관계적 존재다. 사물의 속성은 대상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물과의 상호작용 속에서만 존재하며, 상호작용하는 대상이 달라지면 속성도 달라질 수 있는 두 대상 사이의 관계다. 한마디로 이 세계는 확정된 속성을 가진 대상들의 집합이 아닌 관계의 그물망이다. 이것이 로벨리가 말하는 양자 이론이 밝혀준 실재의 모습이다. 이제 양자 이론은 하이젠베르크의 기대와 달리 양자적 대상이 관찰을 통해 우리(혹은 '관찰자')에게 어떻게 나타나는지를 기술하는 것이 아니라, 두 물리적 대상이 서로에게 나타나는 방식 곧 관계를 기술한다. p. 240-241)
또한 로벨리는 양자 이론의 확률을 정보와 연결 짓고, 정보 역시 두 새상 사이의 상관관계의 산물로 본다. 양자 이론은 대상을 관찰하지 않으면 그것이 어디에 있는지 말해주지 않다가 대상을 관찰하면 어떤 지점에 있을 확률을 말해주는데, 이는 관찰이라는 두 대상 간의 상호작용이 만들어낸 정보의 변화라는 것이다. 두 개의 동전을 자유롭게 던지느냐 아니면 특정한 방식으로 묶어 던지느냐에 따라 일어날 사건에 관한 정보가 달라지고 특정 사건이 일어날 확률도 달라지는데, 이는 두 개의 동전 사이의 상호 관계가 달라진 결과인 것이다. 로벨리는 이런 정보의 관점에서 양자 이론을 새롭게 이해한다.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 원리는 정보의 유한성에 바탕해서 설명하고, 물리적 변수 간의 비가환성은 대상과의 새로운 상호작용이 항상 새로운 관련 정보를 주지만 동시에 기존의 관련 정보를 잃게 만든다는 관점에서 설명한다.
로벨리에게 입자성은 물질과 더불어 양자 현상이 아주 작은 세계에서는 입자적 형태로 나타남을 의미한다. 즉 불연속성을 의미하는 것이지, 세계가 입자와 같은 실체로 이루어졌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또한 로벨리는 이미 그의 저서인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에서 아주 작은 세계에서는 시간과 공간조차도 입자성을 띤다고 주장하였는데, 이는 입자성이 매우 일반적인 것임을 함축한다. (p. 241-242)
마지막으로 이 책에 스며 있는 로벨리의 깊은 철학적 사유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로벨리는 양자 세계에 관한 자신의 관계론적 관점이 자연주의 철학의 바탕 위에 있음을 강조한다. 그는 세계가 인간의 정신 속에만 있다고 보는 관점(관념론)과 세계가 공간 속에서 움직이는 물질 입자들로만 이루어져 있다고 보는 관점(유물론) 모두를 비판한다. 또한 현상 이면에 실재가 있고 현상은 이 대상 실재의 발현이라는 가정을 버리고, 대상을 현상들의 연결 매듭으로 보는 마흐의 생각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인다. 그리고 인간의 의식이나 '나'라는 존재 또한 세계와 마찬가지로 어떤 실체나 토대 없이 관계와 상호작용으로 구성돼 있다고 본다.
이런 로벨리의 자연주의는 초기 대승불교의 핵심 사상인 나가르주나의 공空 사상과 공명한다. 아무것도 그 자체로 존재하지 않는다면, 모든 것은 다른 것에 의존하고 다른 것과의 관계에서만 존재한다면, 이는 독립된 살체의 존재를 부정하는 나가르주나의 공空 과 다르지 않다. 모든 상호작용은 사건이며, 실재를 엮는 것은(이) 가볍고 덧없는 사건인 것이다.
양자 이론의 관계론적 새석에 관한 로벨리의 이야기는 이렇게 마무리된다. 상호 관계를 통해서만 세상은 곤재한다는 그의 메시지는 양자 이론이 밝혀주는 세계의 실재 이미지를 넘어 우리 인간의 삶에도 큰 울림으로 다가온다. 나아가 과학과 철학을 서로 연결해서 견주어보고 서양 철학과 동양 찰학을 함께 아우르는 그의 사유는 관계, 연결 그리고 통섭 그 자체다. 로벨리의 글은 언제나 그랬듯이 수식 없이 이해 가능하며 쉽고 간결하다. 이 책을 통해 독자들도 인간을 포함한 세계 전체를 상관관계와 맥락의 관점에서 이해하는 새로운 시각을 직접 체험해볼 수 있기를 기대한다. (p. 242-2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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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카를로 로벨리 지음 | 이중원 감수 | 김정훈 옮김 『나 없이는 존재하지 않는 세상』, 2023년 12. 1. 초판 1쇄 | 2023. 12. 15. 6쇄 발행 | (주)쌤앤파커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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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카를로 로벨리(지은이 1956~, 이탈리아 출생)/ 세계적인 이론 물리학자. 양자이론과 중력이론을 결합한 '루프양자중력'이라는 개념으로 블랙홀을 새롭게 규명한 우주론의 대가로 '제2의 스티븐 호킹'이라 평가받는다. 1981년 볼로냐대학교에서 물리학 학사와 석사 학위를 받고, 1986년 파도바대학교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프랑스 엑스마르세유대학교 이런 물리학 센터 교수이자 프랑스 대학연구협회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는 『모든 순간의 물리학Sette brevi lezioni di Fisica』『보이는 세상은 실재가 아니다La realta non e come ci appare』『만약 시간이 존재하지 않는다면?Et si le temps n'existait pas?』등이 있다. 2014년 이탈리아에서 『모든 순간의 물리학』이 첫 출간된 이후 그의 책들은 종합 베스트셀러에 올랐고, 영국, 미국, 프랑스, 일본을 비롯한 전 세계에서 번역되어 130만 부 이상의 판매고를 기록한 바 있다. 이는 과학책으로 유례없는 기록이다.
* 김정훈 옮긴이/ 서울대학교에서 서양철학을 전공하고 고전어와 철학을 가르치고 있다. 『죽음: 이토록 가볍고 이토록 먼』 『우리와 그들의 정치』 『보이는 세상은 실재가 아니다』 외 여러 권의 책을 옮겼다.
* 이중원 감수/ 서울시립대학교 철학과 교수. 주요 연구 분야는 과학철학과 기술철학이며, 과학기술이 사회와 맺는 관계를 다각도로 고찰하고 있다. 양자이론, 나노 기술, 로봇 공학. 인공지능 등 어려운 과학이론과 첨단기술을 대중적으로 널리 알리기 위해 강연 · 언론 기고 등 다양한 활동을 하고 있다. 서울대학교에서 물리학 학사 · 석사학위를 받았고, 동대학원 과학사 및 과학철학 협동 과정에서 과학철학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핬다. 한국과학철학회 회장과 한국철학회 회장을 역임했다.
주요 저서로는 『인공지능 시대의 인간학』(공저), 『인공지능의 윤리학』(공저), 『인공지능의 존재론』(공저), 『필로테크놀로지를 말한다』(공저), 『포스트휴먼과 융합』(공저) 등이 있고, 옮긴 책으로는 『모든 순간의 물리학』 『보이는 세상은 실재가 아니다』 『만약 시간이 존재하지 않는다면』을 감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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