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남기 위한 밥 앞에서 외 1편
손한옥
햇빛도 사라지고 구름도 없는 날
230밀리 보살의 발자국
지나간 자리 위
거대한 보리수 뿌리째 흔들리더니
오늘 그 열매 선정에 들었다
살기 위해 받은 한 술의 밥 앞에서
수많은 선지식들 지나간다
그 앞에 무릎 꿇고 읍한다
뿌린 선근 없는데 돌아오는 귀인들의 손에 들린
셀 수 없는 보리수 알알이
귀를 열고 땀땀이 꿰맨 오십 개 바늘 자국 흔적
통증이 맑다
면봉마다 묻힌 신약 약사여래의 손 멈추고
폭풍 지난 자리
이윽고 고요한 귀
나는 이렇게 들었다
세상의 모든 소리소리 가려듣지 말라 한다
큰 소리 작은 소리 각지고 모난 소리
항하사 모래 수만큼 밀려와도
그 귓속 깊고 깊은 샘에서
찬탄의 빛 신묘한 빛
사리로 품으라 한다
-전문(p. 130-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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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사랑꾼 등극
11박 12일 병실에서의 마지막 밤
밖에는 흰 눈이 무섭게 내려도
날만 밝으면 나는야 집으로 간다
선선히 커가는 강생이들 목소리
박달산에 불어 내려오는 솔바람 소리
고기 사고 두부 사고 오르내리면
산유화 피던 뜰과 삼존불의 품으로
막음대 사이로 내 손을 잡고
간이 침상에서 쪽잠 든 모습 바라본다
카리스마 제왕의 모습 사라지고
연분홍 치마 입은 열일곱 살 내 손을 잡았던 소년 있다
철봉대 잡고 하늘을 빙빙 돌던 그 허리 다리 지금
얇은 새우처럼 웅크린 채 근심 품고 잠들어 있다
어디쯤 가서 고요할까
오십 바늘 기워진 통증의 끝은
앉아도 누워도 멈추지 않는 이 비명의 끝은
긴긴밤 네 개의 수액을 달고
내가 일어날 때마다 수십 번
말없이 일어나 내밀던 등
내 일생을 운행하던 등
조선의 사랑꾼 등극,
(며늘아기가 아버님께 바친 면류관)
그 극에 이르자면 생명을 담보로 하는가
블랙홀 따라 든 악성의 겨울
기적으로 지나가고 유록의 봄 오면
나 이제 맹목으로 지극하고
그대 맹목의 군림을 경배로 허용하겠다
-전문(p. 126-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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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집 『사랑이 깊어 내가 아프다』에서/ 2024. 7. 30. <문학과사람> 펴냄
* 손한옥/ 2002년『미네르바』로 시 부문 & 2016년『한국미소문학』으로 동시 부문 등단, 시집『목화꽃 위에 지던 꽃』『직설적 아주 직설적인』『13월 바람』『그렇다고 어머니를 소파에 앉혀 놓을 수는 없잖아요』『얼음강을 건너온 미나리체』, 동시집
『햇빛 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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