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지에서 읽은 시

정과리_죽음에 맞선 순수의 형태들 1 (발췌)/ 다시 마카로니 웨스턴 : 전봉건

검지 정숙자 2024. 8. 9. 01:23

 

    다시 마카로니 웨스턴1)

 

     전봉건(1928-1988, 60세)

 

 

 

  누가

  하모니카를 부는데

  두레박 줄은 끊어지기 위해서 있고

  손은 짓이겨지기 위해서 있고

  눈은 감겨지기 위해서 있다.

 

  그곳에서는

  누가 하모니카를 부는데

  피를 뒤집어쓰고 죽은 저녁노을이

  까마귀도 가지 않는 서쪽 낮은 하늘에

  팽개쳐져 있다.

      -전문-

 

  죽음에 맞선 순수의 형태들 1 (발췌)/ 전봉건 : 죽음을 횡으로 캐다_ 정과리/ 문학평론가 

  전봉건의 "투명한 표현"을 어디서 확인하고 느낄 수 있을까? 의외로 가까운 곳에서 발견할 수 있다. 하지만 사연은 짧지 않다. 우선 시인이 현실을 묘사하는 양상을 보자.

 

          *

  이(위) 시의 이미지가 너무 극단적이어서인지 부적절한 해석이 붙곤 했다. '마카로니 웨스턴' 연작에서 표현된 인물의 모습을 두고 "꿈과 현실의 종합을 염원하는 시인만이 특권처럼 변신할 수 있는 악당의 모습에 다름아니"라고 전제한 후, "그러고 보면 「다시 마카로니 웨스턴」은 이러한 파괴가 이룩할 수 있는 지복의 경지라고 할 수 있다"고 결론을 내린 것은 시의 언어는 일상 언어와 다르다는 선입관이 작용하여 괴이한 오독으로 빠진 경우로 보인다. 시 언어는 일상 언어와 그냥 다른 게 아니라, 일상 언어로부터 태어나 일상 언어의 편협성-상투성과 그것이 감춘 이데올로기를 혁파하면서 일상 언어의 가능성을 열어 보이는 언어이다. 그것이 시 언어의 존재 절실성이다. 그런 연유를 고려치 않고 마치 시 언어의 특권을 누리는 존재도 덩달아 특별한 지위에 속한다는 착각을 즐기는 것은 윤리적인 문제에까지도 연루되는 '소모성 넌센스'이다.

  그런 의미에서 시의 표현들은 우선은 '문자 그대로' 읽어 그것이 현상하는 이미지들을 상식적인 수준에서 느끼는 게 중요하다. 이 시의 광경은 말 그대로 전적인 절망의 상태로 전락한 세상의 모습이다. 시인이 직접 전쟁에 참여했었다는 걸 고려한다면, 그리고 이미 충분히 음미했듯이 전쟁 속에서 그가 무엇을 겪었는가를 유념하면, 이 광경의 생생함은 더욱 진해진다. 더욱이 시의 제목으로 쓰인 '마카로니 웨스턴'을 생각해 봐도 그렇다. "이건 엉터리 웨스턴, 가짜 웨스턴이다"라는 뜻이 아니겠는가? 소위 '웨스턴'의 통쾌와 정의감이 포장지처럼 너덜너덜하게 붙어 있는 게 '마카로니 웨스턴'이다.

  김현만이 이 연작을 정확하게 해석했다. 그는 '마카로니 웨스턴'을 "절망적인 검은 핏덩이의 세계"라고 보았고, 이를 "70년대의  한국 현실"의 투영으로 보는 한편, "즐거움이 없는 세계"라는 시인의 정서까지 읽었다.2) / (p. 시 208/ 론 209)

 

   1) 남진우(엮음) 『전봉건 시 전집』, 2008. 문학동네

   2) 「둥그런 불의 세계」, 『책읽기의 괴로움』(1984) in 김현, 『김현문학전집 5: 책읽기의 괴로움/ 살아 있는 시들』, 문학과지성사, 1992, p. 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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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현대시』 2024-5월(413)호 <기획연재 59/ 정과리의 시의 숲속으로> 에서  

  * 정과리/ 1979년 《동아일보》신춘문예로 평론 부문 등단, 저서 『문학, 존재의 변증법』(1985), 『스밈과 짜임』(1988), 『글숨의 광합성』(2009), 『1980년대의 북극꽃들아, 뿔고둥을 불어라』(2014) 외 다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