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지에서 읽은 시

연차휴가/ 유현아

검지 정숙자 2024. 7. 21. 01:14

 

    연차휴가

         되어진다고 믿는 것들

 

     유현아

 

 

  우리는 이렇게 살지 말자, 라고 말하는 사람 앞에서

  그럼 우리는 다르게 살아야지, 라고 주장하는 사람 

  앞으로

  쏟아져 내려오는 야근 뒤의 사람들은

  어떤 기대도 하지 않고 떠밀려 가는 구름처럼

  하루의 하루를 비워 둔 채로 산다고 말하지

 

  (아버지는 사장을 꿈꿨다)

 

  이 세상이 아름답게 되어질 거라고 말하는 사람은

  오후 네 시의 따분함처럼 적막을 기다리고

  어깨와 어깨가 부딪히는 시간은

  금방 사라지게 되어질 거라고

  상자 안에 들어가서 군데군데 빈말을 뿌려 놓는다 

 

  (아버지는 망했다)

 

  야근을 끝내고 집으로 가는 지하철을

  기다리는 사람이 어제보다 많은

  이유를 알고 싶지 않다

  봄이 오고 있었지만 여전히

  겨울 코트를 여미는 사람들

  사이에 끼면 지하철은 한여름이고

  어떤 봄은 지겨우리만큼 느리고 오는 것 같은데

 

  (사장이 되고자 했던 아버지는 이제 안다)

 

  나는 안다

  야근을 천 번 만 번 해도 쌓이는 것은 환상뿐이라는 것을

 

  (사장은 되는 것이 아니라 되어진다는 것을)

 

  저기 쭈그려 앉아 흔들거리는 손으로

  잡초를 뽑고 있는 아버지는

 

  점점 봄이 되어 가고 있다

     -전문(p. 1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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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계간파란』 2024-봄(32)호 <poet/ 신작>에서

  * 유현아/ 2006년 <전태일문학상> 받으며 작품 활동을 시작, 시집『아무나 회사원, 그밖에 여러분』 슬픔은 겨우 손톱만큼의 조각 , 청소년시집『주눅이 사라지는 방법』, 미술에세이『여기에 있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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