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체전선
류성훈
아버지가 심은 호박들이 가뭄에 모조리 죽은 다음 장마가 시작된다 나는 당신 대신 화를 냈고 당신은 호박 대신 내게 화를 냈다 뭐든 때를 맞추지 않으면 소용없다고, 구청에서 무수히 심었던 들꽃이 중장비에 다 엎어지는 공원에서 이럴 거면 왜 심었냐고 행인들이 허공에 따졌다 나는 허공에게 욕을 먹었다
잡초만 뽑다 벌써 무릎이 아프고 완전군장으로 산 몇 봉우리를 넘어 다니던 관절은 언제 어디로 가 버린 건지, 아무도 아무에게도 안부를 묻지 않던 그때부터 우리는 잡초만 뽑았다 작년에도 올해도 소나무 탁상에 생긴 새 구멍에서 톱밥이 다시 쏟아져 나왔고 이번이 마지막일 거라고 자부했다
호박잎보다 더 큰 토란잎보다 더 큰 해바라기 잎이 지나가던 볼살을 긁으면 피부보다 따가운 태양이 도시교통에 시비를 붙였다 심을 것과 심을 곳이 앞다투어 가는 통에 나는 죽은 지 오랜 사람의 글만 골라 읽으며 살았다 내 차례는 언제 올까 이미 가 버렸을까
-전문(p.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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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계간파란』 2024-봄(32)호 <poet/ 기발표작>에서
* 류성훈/ 2012년 ⟪한국일보⟫ 신춘문예를 통해 시인으로 등단, 시집『보이저 1호에게』『라디오미르』, 산문집『사물들 The Things』『장소들 The Plac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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