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지에서 읽은 시

내 그리움은 늙지 않네/ 백무산

검지 정숙자 2024. 7. 21. 02:18

 

    

    내 그리움은 늙지 않네

 

     백무산

 

 

  한두 집 떠나더니

  잠시 아들네 집 다녀온다더니

  수술하고 금방 돌아온다더니

  딸네 집 가서 겨울나고 설 대목 안에 꼭 온다더니

  어느새 마을 전체가 비었네

 

  이 마을 실거주자는 묶인 개 한 마리와

  감나무 까치집에 까치 두 마리

  아랫마을에서 반장 집 사위 되는 이가

  어쩌다 경운기 끌고 잠시 다녀가고

  개밥 주러 온 승용차가 어쩌다 다녀가고

 

  마당엔 털다 만 깻단들 바람에 흩어지고

  어무이 아부지 땀 배인 집 나고 자란 마을

  언젠가 다시 돌아올 거니까 다짐 두었지만

  삶은 버겁고 기억도 낡고

  텃밭에 열무 배추 갈아 놓았지만 잡초만 뒤덮고

 

  시린 초겨울 하늘은 퉁퉁 부어 있고

  주인이 오지 않아 장독들 풀 죽어 있고

  뒷마당 대나무는 아궁이까지 뚫고 올라와 있고

  명아주 마른 미궁은 처마에 닿아 있고

 

  어둠이 와도 불 한 점 켜지지 않고

  찬바람 불어도 연기 나는 굴뚝 하나 없고

  얼룩투성이 달은 무너진 스레트 지붕에 붙들려 있고

  멀리서 부엉이 유령처럼 울고

 

  그러나 그러나 나의 그리움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고

  내 그리움은 여전히 저 달빛 고개를 넘고

 

  죽어 떠난 강이 출렁이며 돌아오듯이

  황폐한 땅에 숲은 다시 돌아올 약속을 하듯이

  오래된 강은 한 번도 낡은 적 없듯이

  오래된 숲은 언제나 이제 막 태어난 것이듯

  내 그리움은 낡아 본 적이 없네

  내 그리움은 한 번도 늙어 본 적이 없네

  소 한 마리 끌고 고개 넘는 내 그리움은

      -전문(p. 38-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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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계간파란』 2024-봄(32)호 <poem>에서

  * 백무산/ 1984년 『민중시』로 등단, 시집『만국의 노동자여』『이렇게 한심한 시절의 아침에』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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