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지에서 읽은 시

붓꽃/ 이근영

검지 정숙자 2024. 7. 19. 17:34

 

    붓꽃

 

    이근영

 

 

  노란색 불빛으로 색칠한 카페 테라스

  짙푸른 색의 우울이 숨어 있는 하늘

  풍부하게 채색이 되는 밤

 

  너에게 편지를 쓸게

 

  까마귀들이 몰려드는 끊어진 길가

  회오리바람에 휘둘린 별이,

  별들이 빛나던

 

  그림을 너무 자세히 보다가 목이 칼칼해졌어

  날숨이 울대마개를 스치고 나올 때마다

  보라색 꽃잎이 바스러지는 소리를 들을 수 있을 거야

 

  살아있으면 다행인 거야

  열 번도 더 죽을 수 있었는데

 

  너무 오랜 시간 책장을 넘기고 있었어

 

  컴컴하게 덧칠한 색채를 긁어내면

  나이프 가득 묻어나는 어두운 피

 

  진화하는, 너는

  피를 묻히는 것

  피 묻은 너를 그리는 것

  캔버스에 너의 피를 뿌리는 것

 

  곧게 목을 세운 붓꽃은 정원의 구석에 서서 휘돌아 가며 빛나는 별의 꼬리를 바라보고, 무뚝뚝한 총소리 책 속에서 붉게 번지는 밤

    -전문(p. 152-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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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현실』 2023-여름(92)호 <신작시> 에서  

* 이근영/ 2021년 계간『시현실』로 등단, 시집『너무 가까이 서 있지 마세요』(공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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