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지에서 읽은 시

곽효환_'오래된 책'과 '미래의 책' 사이에서(발췌)/ 오래된 책 : 곽효환

검지 정숙자 2024. 7. 18. 17:56

 

    오래된 책

 

     곽효환

 

 

  하늘 가득 펑펑 쏟아진 눈 쌓이고 동장군이

  동네 꼬마들의 바깥줄입을 꽁꽁 묶은 날 저녁이면

  어머니는 감자며 고구마를 삶고

  누이와 나와 사촌들은

  구들방 아랫목에 깐 이불에 발을 묻고

  할머니의 옛날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어릴 적 약을 잘못 먹은 탓에

  길눈이 어둡고 글을 배우지 못했지만

  어느새 마을 최고의 흉내쟁이이자 이야기꾼이 된

  할머니의 이야기는 밤 깊어도 마를 줄 모르고

  아이들은 졸린 눈을 부비며 귀를 세우다가

  하얀 눈을 소리도 자국도 없이 밟으며 온다는

  눈 귀신에 진저리 치곤 했다

 

  다음 날이면 나는

  말 한마디 토씨 하나 숨소리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외워서

  녹음기를 틀어놓은 것처럼

  그 서사 그 느낌 그 흥분을

  에워싼 동리 아이들 앞에서 재현하는

  이야기꾼이 되곤 했다

 

  아직 글을 다 깨치지 못한 어린 내게

  할머니는 살아 있는 귀한 책이었다

  할머니에게도 그런 책이 있었을 테고

  다시 그 할머니의 할머니에게도

  오래된 그런 책이 있었을 게다

  오래오래 전해져 내려오다

  그만 내가 잃어버리고 만

     -전문/ 시집 『슬픔의 뼈대』(문학과지성사, 2014)

 

  '오래된 책'과 '미래의 책' 사이에서(부분)_곽효환/ 시인

  나는 1960년대 후반 도청 소재지가 있는 남쪽의 지방도시에서 태어났다. 농업이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모두들 가난했던 시절, 전라북도의 잠업을 총괄한 제법 높은 지방공무원이었던 조부는 은퇴한 후 전주시 외곽의 송천동에 커다란 텃밭이 딸린 널따란 대지를 잡고 큼지막한 개량한옥을 지었다. 하지만 은퇴한 조부는 마작판과 작은댁으로, 아버지는 다른 지방 도시로 떠돌았기에 그 집은 할머니와 어머니, 과년한 고모들, 그리고 어린 누이와 내가 지키는 '여인들의 집'이었다. 노을이 내려앉고 시나브로 어둠이 밀려드는 저녁 무렵이면 기다려도 오지 않는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부재한 커다란 한옥에 쓸쓸함과 함께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았고 나는 그 여인들의 집에서 유년시절을 보냈다.

  그런 밤이면 구들방 아랫목에 깔린 이불에 옹기종기 모인 손주들에 둘러 싸여 할머니는 이야기보따리를 풀었다. 어린 시절 약을 잘 못 먹은 탓에 할머니는 글을 익히지 못했고 유난히 길눈이 어두웠지만 대신 인간 복사기였다. 한번 들은 이야기는 잊는 법이 없었고 사람이든 동물이든 한번 본 행동이나 특징을 그대로 재현하는 마을 최고의 흉내쟁이였다. 나는 밤마다 이어지는 할머니의 옛날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고기잡이 나간 남편을 기다리다 선 채로 망부석이 되었다는 어느 바닷가의 젊은 아낙의 순애보에서부터 보름달이 휘영청 뜬 밤이면 예쁜 처녀로 둔갑하여 지나가는 행인을 홀린다는 꼬리 아홉 달린 여우이야기 그리고 하얀 눈을 소리도 자국도 없이 밟으며 온다는 눈 귀신이야기까지 나는 졸린 눈을 부비며 끝없이 이어지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그리고 다음 날이면 동네 아이들을 모아 지난밤에 들은 이야기들을 말 한마디, 토씨 하나, 숨소리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재현하려고 애를 썼다. 그렇게 나는 동네아이들 사이에 최고의 이야기꾼이 되었다. 

  할머니는 이제 막 글자를 익히기 시작한 나의 첫 번째 책이자 나만의 책이었다. 그리고 살아 있는 상상력의 보물창고였다. 이것은 빈곤하기 그지없지만 내가 이나마 문학적 토양을 갖추고 글을 쓸 수 있게 한 맹아였을지도 모른다. 할머니라는 나만의 책은 사실 할머니에게도 있었을 것이다. 할머니에게 물려준 할머니가 있었을 것이고 다시 그 할머니에게 물려준 이전의 할머니가 있었을 것이다. 입에서 입으로 대대손손 이어져 내려오면서도 여전히 살아 있는 이 '오래된 책'을 내가 물려받은 것은 분명하다. 그런데 나는 할머니와 함께 이 책도 잃어버리고 말았다. (p. 시 56/ 론 54-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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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현실』 2023-여름(92)호 <집중조명/ 산문> 에서  

곽효환郭孝桓1967년 전북 전주 출생, 1996년 ⟪세계일보⟫에「벽화 속의 고양이 3」을 발표하고 & 2002년『시평』에「수락산」외 5편을 발표하며 작품활동 시작, 시집『인디오 여인』『지도에 없는 집』『슬픔의 뼈대』너는』등. 저서『한국 근대시의 북방의식』『너는 내게 너무 깊이 들어왔다』등. 편저『이용악 시선』『구보 박태원의 시와 시론』『아버지, 그리운 당신』『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백석 시그림집』, 『이용악 전집』(공편), 『청록집  청록집 발간 70주년 기념 시그림집』『별 헤는 밤  윤동주 탄생 100주년 기념 시그림집』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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