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봇대 외 1편
서이령
나는 전봇대 집에서 자랐습니다
자두나무보다 더 큰 전봇대는
대문 밖에 서 있었습니다
전봇대는
호수 건너편까지 줄을 늘이고
도시의 골목을 꿈꾸었을지 모릅니다
나는 조금씩 자라는 키를
전봇대에 새겼습니다
전봇대와
전봇대 사이에
나의 어린 시절이 있었습니다
그곳엔 푸른 하늘이 있고
미루나무와 교회 종탑 사이를 날아가는
큰 새가 있었습니다
-전문(p. 3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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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살아야겠으니
걸어보기로 했다. 어두운 길이 엉켜 있다. 겹쳐져 알 수가 없다. 편백나무 숲에서 50cc 스쿠터를 타고 지나쳤던 남자가 신호등에 걸려 서 있다. 걸음을 멈춘 게 이쯤이라고 생각한다. 후회만 남기는 게 결혼뿐일까. 그네에서 수없이 떨어지는 꿈을 꾼 적 있다.
부엉이를 싣고 치악재를 넘던 새벽 자주 비가 내렸다. 자동차 바퀴들은 나무들을 당기며 굴러가고 있다. 잠을 쫓아내려고 라디오 볼륨을 키운다. 길 끝에 서서 날이 새지 않는다고 중얼거린다.
여전히 바람이 불고 새 한 마리 날려 보내려고 애만 쓰다 그만 돌아선다. 살았다는 느낌을 통증으로 확인한다. 몇 알의 진통제를 삼킨다. 죽음까진 갈 길이 멀다. 아직 살아야겠다.
-전문(p. 1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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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집 『세 번째 출구에서 우리는』에서/ 2024. 5. 16. <문학의전당> 펴냄
* 서이령/ 충북 제천 출생, 2009년 연간지『강원작가회의』로 등단, 시집『오래된 맑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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