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 처음의 신화 외 1편
김성조
언제나 없는 너와
언제나 그리워하는 나 사이에
천 년 전에 새겨두었던 약속은
그리 믿을 것이 못 된다
바람은 어제처럼 빌딩 몇 채의 불빛을
강물 속에 부려놓고 다리 저 끝으로 멀어진다
거꾸로 선 불빛들은 젖은 채로
하늘의 별빛을 출렁이면서 세상
온갖 이야기를 다 흐를 듯하다
지친 다리를 끌며 오후를 건너는 동안
나무는 초록과 단풍을 번갈아 입으며
다시는 꿈꾸지 않으리라던
어느 적막한 날의 울음을 떠올린다
너 없는 봄을 기다리고
너 없는 가을을 작별하고
오늘은 나를 만나기 위해
오랜 누각에 빗발치는
맨 처음의 신화를 채록한다
-전문(p. 96-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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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다리 전설
달밤이면 소복素服의 여인이 빨래를 한다는
그 돌다리는 입에서 입으로 전해진 세월만큼
몸에 패인 이야기의 흔적도 깊다
한밤중 물 방망이질은 금기시된 행위
근동近洞에서는 보지 못했다는 여인의 모습은
처음부터 으스스한 바람을 품고 있었다
아버지의 늦은 귀가 길
헛기침으로 짐짓 돌다리를 건너면 여인은
방망이질을 멈추고 내외하듯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는 웬일인지 얼른 빨래함지를 챙겨 이고
멀찍이 아버지의 걸음을 따랐다
아버지가 언덕을 오르고 논길을 걷는 사이
여인도 소리 없이 달빛을 걸었다
동네 입구 임가네 선산 무덤가에 앉아
아버지가 반짝 담배를 피워 물자, 그때서야
여인은 꿈결같이 깜빡 사라졌다
이때쯤 누렁이도 귀를 열고 컹컹 짖었다
돌다리 전설에 덧대어진 아버지의 이야기는
잊혀지지 않는 내 마음 속 전설이 되었다
오늘도 아버지와 여인과 달밤이 이미 없는 돌다리를 건너고 있다
-전문(p. 81-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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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집 『신화의 푸른 골목길을 걷다 』에서/ 2024. 4. 26. <역락> 펴냄
* 김성조/ 경남 김해 출생, 1993년 『자유문학』신인상으로 시 부문 등단, 시집『그늘이 깊어야 향기도 그윽하다』『새들은 길을 버리고』『영웅을 기다리며』등, 시선집『흔적』, 학술저서『부재와 존재의 시학-김종삼의 시간과 공간』『한국 근현대 장시사長詩史의 변전과 위상』, 평론집『詩의 시간 시작의 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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