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로왕의 골짜기
김성조
산이 맑고 들이 아름다운 고을에는 눈빛 선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전해온다 그 이야기는 다산多産의 평화와 그해 농사를 기름지게 하는 물소리를 닮아 있다
어느 해, 하늘이 친히 목소리를 내어 춤추고 노래하며 나를 맞으라 명하신다 구지봉의 북소리 뜨겁게 해를 오른다 붉은 보자기에 싸인 여섯 개의 알 그 중 황금빛 짙은 얼굴 먼저 껍질 깨고 나와 바다를 다스리는 손을 들어 보였다
수로왕의 골짜기엔 해마다 젊은 꽃들이 가지를 벋어 봉우리마다 마을이 들어선다 어디에도 없는, 어디에나 있는 소리의 근원을 채워가기 위해 밤낮의 길이를 처마 끝에 새겨두고 맨발의 새벽나루를 저어간다
이야기는 어린아이의 강보에 싸여 오늘도 이웃집 담장 너머로 줄기를 낸다 아이들은 단잠에 귀가 밝고 겨드랑이엔 제 고장의 풀꽃 하나씩 꽂아도 좋다
-전문-
해설> 한 문장: 옴파로스는 신과의 소통을 위해 설정된 매개체이기도 하지만 듣기만 하는 곳이 아니라 자기 고백의 장소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이 시집에서 가야 신화는 수로왕의 이야기에서 벗어나 김성조 개인의 고백 서사로 변주된다. 기존 가락국 신화는 하늘과 맞닿아 있지만 이 시집 속 가야 신화는 아래로 아래로 내려가 가장 낮은 곳에 뿌리를 대고 있다.
그 장소는 노자가 말한 곡신이 거주하는 곳이다. 다산과 풍요의 물소리가 끊이지 않는 모성이 자리하는 곳이다. 그 품에 "눈빛 선한 사람들"이 대를 거듭하며 존재한다. 그리고 바다를 향해 가는 생명의 회귀를 반복하고 있다. 수로왕은 이름만 있을 뿐 곡신의 골짜기에는 꽃과 아이들로 천지의 뿌리를 이루고 있다. 거기까지 가서 시인은 고백한다. "어디에도 없는, 어디에나 있는 소리의 근원을 채워가기 위해 밤낮의 길이를 처마 끝에 새겨두고 맨발의 새벽나루를 저어간다"라고. 그러므로 이 시집에 실린 시들은 '어디에도 없는' 사연을 '어디에나 있는' 형식(소리)에 채운 흔적이다. 이때 김성조는 '밤낮의 길이를 처마 끝에 새겨 두'듯 시간을 자유롭게 운용하는 현묘한 곡신으로 변신한다. 그리고 몸에 파인 이야기들을 간직한 채 맨발로, 원초적 형상으로 새벽 나루에서 새롭게 시작할 시간과 대면한다. (p. 시 14/ 론 121) <이민호/ 시인 · 문학평론가>
-------------------------
* 시집 『신화의 푸른 골목길을 걷다 』에서/ 2024. 4. 26. <역락> 펴냄
* 김성조/ 경남 김해 출생, 1993년 『자유문학』신인상으로 시 부문 등단, 시집『그늘이 깊어야 향기도 그윽하다』『새들은 길을 버리고』『영웅을 기다리며』등, 시선집『흔적』, 학술저서『부재와 존재의 시학-김종삼의 시간과 공간』『한국 근현대 장시사長詩史의 변전과 위상』, 평론집『詩의 시간 시작의 논리』
'시집에서 읽은 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신을 잃어버렸어요+해설/ 이성혜 (0) | 2024.05.05 |
---|---|
맨 처음의 신화 외 1편/ 김성조 (0) | 2024.05.02 |
점(點) 외 1편/ 이정현 (0) | 2024.05.01 |
비결/ 이정현 (0) | 2024.05.01 |
거기 외 1편/ 동길산 (0) | 2024.04.2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