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결
이정현
꽃 같은 나이에
선방에 앉아 있으려니
등 뒤에서 누가 바닥을 톡톡 친다
차 한잔하러 오시게
졸다가 놀라 얼른 스님의 뒤를 따르니
내가 요즘 통 잠을 못 이루는데, 자는 비결이 뭔가
그냥 앉아 있었을 뿐인데요?
그냥 앉아 있었다고?
찻잎이 웃는다
선문답식 노트:
주신 엽서에 "밖으로 모든 연緣을 쉬고 안 마음이 헐떡임이 없어야 가可히 써 도道에 든다고 하심이여, 이는 방편문方便門이라." 하셨느니라.
-전문-
해설> 한 문장: 이 시집 모든 시의 끝에는 위에서처럼 "산문답식 노트"가 달려 있다. 이것은 일종의 '시작 노트'라고 할 수도 있는데, 일반적인 시작 노트와 달리 본문과 화학반응을 일으키며 본문의 영역을 더욱 확장한다. 이런 형식은 중국 남송대의 선승 무문혜개가 지은(선 사상의 고전이라 할) 『무문관無門關』의 구조와 유사하다. 『무문관』은 총 48칙則의 공안을 싣고 있는데, 각 칙의 본문이라 할 "고칙"은 "무문의 말"과 "무문의 송"으로 이어지며, 말미엔 항상 "군소리"라는 형식이 따라붙는다. 그야말로 선문답인 고칙의 의미는 말과 (게)송을 거쳐 군소리에 이르면서 더욱 분명해지는데, 이 시집의 "선문답식 노트"는 바로 그 "군소리"의 역할을 한다는 점에서 시의 바깥이 아니라 안에 있다. 말하자면 이정현의 선시에서 "선문답식 노트"는 시의 일부이지 시의 설명이 아니다. 위의 작품은 짐짓 가벼운 위트를 동원하며 '도에 이르는 길'의 핵심을 보여준다. "꽃 같은 나이"의 화자는 선방에서 도를 가르치는 선승에게 가르침을 받기는커녕 깨우침을 준다. 잠을 잘 자는 비결이 뭐냐는 선승의 질문에 화자는 "그냥 앉아 있었다"라고 말한다. 화자는 역설적이게도 깨우침의 열성조차 버리고 "졸다가" 깨우침의 경지에 이른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이 시의 "선문답식 노트"에 그 답이 있다. 집착을 버렸을 때 "밖으로 모든 연緣"의 쉼이 오고, "안 마음이 헐떡임이 없어야" 도에 든다. (p. 시 18/ 선문답식 노트 19/ 론 117-118) <오민석/ 문학평론가 · 단국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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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집 『점點』에서/ 2024. 4. 30. <황금알> 펴냄
* 이정현/ 1964년 강원 횡성 출생, 2007년『수필춘추』로 수필 부문 & 2016년『계간문예』로 시 부문 등단, 시집『살아가는 즐거움』『춤명상』『풀다』 등, 시선집『라캉의 여자』, 평론집『60년대 시인 깊이 읽기』, 산문집『내 안에 숨겨진 나』, // 동국대 대학원 선학과 졸업, 현) 관공서, 동국대 평생교육원에서 요가와 명상을 강의하고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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